2015.01.29 13:09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중 전직 대통령들을 10번이나 초청한 유일한 대통령 김대중과 차용애(車容愛). 파란만장 험했던 길.
신은 사람을 만들 때 내일 일을 모르게 했고 10 년 후를 모르게 했다. 막막한 일 하나를 풀고 나면 되겠지 했지만 더 어려운 일이 기다릴 때도 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기가 찬 시련이 닥치는가 하나님도 무심하지 한탄도 한다. 김대중도 죽을 고비에 있을 때 마다 앞이 캄캄 했을 것이다. 5.16 혁명 후 30 년 동안 납치 테러 사형선고 감옥(6년) 망명(10년) 가택연금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인동 초처럼 살아서 대통령도 하고 통일한다고 김정일도 만나 6.15 a공동성명에 서명까지 받아 왔고 수수천명이 김대중에게 노벨상 주면 안 된다고 서면으로 반대하고 로비까지 했지(노벨상 위원회 회장 말)만 노벨평화상도 수상한 했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자신이 하숙하고 있던 집 주인의 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차용애는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녔고 나이는 김대중보다 한 살 아래(1927)였다. 김대중은 목포상고 다닐 때 일등을 놓치지 않은 영리했던 학생이었고 웅변을 잘했다. 차용애의 아버지는 보잘 것 없었던 김대중과 딸의 결혼을 반대 했다. 김대중은 양단간에 담판을 짓겠다고 장인 될 사람에게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본인 용애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아버지는 설마 용애가 전 집안이 반대하는 신랑깜 김대중이에게 시집가겠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고 용애를 사랑으로 나오게 하고 김대중 앞에서 물었다. 딸 용애의 대답은 놀랍게도 대중에게 시집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혼인은 성사 됐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에 1954년과 1959년에 입후보 했지만 실패 했다. 수입도 없고 선거로 빚이 산테미처럼 쌓여 생활이 곤궁해 졌다. 호강하던 부잣집 딸이 딸이 남편 잘못 만나 방물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인제 보궐선거(1961)에 입후보 했지만 군인만 있는 일선 지역이라 당선이 불가능 했다. 유세장에는 일반인은 없고 군경과 첩보원들만 있었다. 차용애는 남편에게 “부정선거에는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격려 하면서 한쪽으로는 신문사 기자들에게 “자기 남편이 이번에는 꼭 당선되도록 살려 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당신들이 볼 때 이미 나는 죽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유언도 있었다. 기자들이 불이 나게 가보니 그는 이미 죽은 후였다. 이로 인해 김대중후보는 기자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유권자들의 동정으로 선거에 이겼다. 유권자들에게 당선 인사를 하고 새벽 밤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 새벽부터 국회 문 열 때를 기다려 의원 등록을 했다. 그러나 5.16이 일어나 국회는 문을 열지 못했고 의원 선서도 못했다. 3년 후에 4살 연상의 이희호 여사(1922. 감리교 장로)와 결혼해서 42살 여자로서는 아주 늦은 나이에 홍걸이를 낳았다. 이희호 여사는 역대 9명의 영부인 중에 제일 학벌(이화 여고, 이화여전, 서울 대 사범대 교육학과, 명예박사 등)이 좋고 사회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전실 자식인 홍일 홍업이 서운해 할까봐 홍일 홍업이 앞에서는 자기가 배 아파 난 홍걸이를 안아 주지도 못했다고 한다. 말년에 병원에서 남편 김대중의 마지막 병상을 지키고 있을 때 이휘호여사는 남편의 손발이 차갑다고 손수 벙어리장갑과 덧양말을 떠서 김대중의 손과 발에 끼워 주었다. 사람을 잘 알아 보지도 못하는 남편이 그 장갑이 눈물의 장갑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김배중은 여복이 여복이 많았던 사람이다. 5 대 6,7,8,13대 국회의원을 했고 노벨평화상을 비롯해 명예박사 등 13 개 나 되는 상을 받았고 책도 21권이나 썼다.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김대중은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해선 안 된다. 국민모두 양심을 갖고 행동하면 어디서 이 땅에 독재자가 다시 나오고 소수만 영화누리고--. 자유와 서민경제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우리 모두 들고 일어나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들자--. 이명박 정부는 명심해야한다--” 라고 선동하는 듯 한 웅변조의 연설을 했다. 청와대는 “국민 분열시키는 발언”이라고 언짢아했고 김영삼은 “전직대통령이란 자가 틈만 나면 요설(饒舌)로 국민선동 하는 것 묵과 못해”라면서 비판했다. 하지만 현직 이명박 대통령은 문병 왔다. 김영삼도 문병와서 이 희호 여사를 만나 “김대중 대통령과는 경쟁하면서 협력해 온 사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특수한 관계다” DJ(김대중)가 20 년 전에 “내가 죽었을 때 제일 슬피 울 사람이 김영삼 총재고 김영삼 총재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피 울 사람이 김대중”이라고 말 했다면서 이희호 여사를 위로 했다. (동교동과 상도동은)화해 한 것으로 봐도 되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영삼은 “그렇게 봐도 된 다 그럴 때도 됐고--”. 미국 16대 대통령 린컨은 자기에게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정적인 공화당 후보였던 씨워드를 찾아가 자기를 도와 달라”며 그를 국무장관을 해달라 했지만 거절 당했다. 하지만 삼고초려한 끝에 합의를 봤다. 국무장관이 된 씨워드는 온 국민의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불모지 어름의 땅 아라스카를 소련으로부터 에이커 당 2 전씩에 사들였다. 아라스카주는 미국에서 제일큰 주다 지금 아라스카 빠은 석유가 샘솟는 석유를 팔아 주민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금 싸라기 땅이다. 세금을 내는 것이아니라 돈을 주는 미국 유일한 주디. 린컨이 극장에서 암살 됐을 때 제일 슬피 운 사람이 씨워드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주화라는 한 통속에 공존하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는 단결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경쟁했다. DJ가 살아온 여정에는 많은 역경이 있었지만 다 넘기고 대통령까지 했다는데 많은 교훈이 있다. 전두환은 5.18 하루 전날 김대중을 체포했고 내란죄로 사형을 성고 했지만 자기 아들 아들형제를 동교동으로 보내 정중하게 문병하게 했고 연세 병원에도 직접 찾아가 문병했다. 전두환은 노태우가 대통령 현직에 있을 때 백담사에 유배돼 있었고,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있을때 김영삼은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재직 당시인 98년엔 전두환 내외를 청와대로 초청하고 건배를 하도록 제의 했고, 김대중이 감옥에 있을 때 전두환은 현직에 있으면서 이희호 여사를 2시간씩이나 만나주었고 이 휘호 여사는 이 자리에서 남편 석방을 부탁했다. 또 둘째 아들 홍업의 결혼과 관련해서도 전두환대통령에게 신세를 졌다는 내용이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에 써 있다고 한다. 전두환은 김대중을 문병하면서 이희호 여사의 손을 잡고 “김대통령이 재임중에 전직 대통령들을 10번이나 불러 주어서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고 위로 했다. <차락우 카럼은 www.seoulvoice.com 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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