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04 14:41
여러사람 뺨 때린 이명박 회고록. 정상회담 1만 딸러 내 놓으며 애걸?
이명박 회고록 사면초가.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김정일은 자기를 만나려고 여러 채널을 통해 연락해 왔지만 나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 회담을 요구 했기 때문에” 결국은 임기중에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옛 날 경복궁에는 승정원이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와 같다. 승정원에는 도승지(비서실장)와 사관(史官)이 있었다. 사관은 임금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해 사초로 남기는 일을 했다. 이 기록이 승정원 일기다. 사초는 임금 자신도 열람하지 못하게 국법으로 정해 놨다. 그런데 국법을 깨고 사초를 강제로 열람하고 나라에 큰 사단을 일으킨 임금이 있다. 그는 바로 10대 임금 연산왕이다. 성종은 죽으면서 연산의 생모 폐비 윤씨에 대한 비밀을 연산에게 일체 비밀로 하라고 유언을 했다. 연산은 사초를 보고 생모 윤씨가 폐비가 된 이유와 사가로 쫓겨 나 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연산은 폭군이 됐다. 윤씨가 폐비가 될 때 관계됐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여러차례 사화를 일으키며 죄 없는 선비들까지도 죽였다. 그러자 중종반정이 일어나 임금에서 연산군(君)으로 강등 됐다. 사초를 열람한 또 하나의 임금이 있다. 여러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형제들을 죽이고 임금이 된 제3 대 태종 이방원이다. 왕도에 조금이라도 거치작거리는 사람은 처남이든 사돈이던 가리지 않고 죽였고 자기 아버지 이성계가 개국하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정도전까지도 죽여 없앴다. 이방원도 국법을 어기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초를 열람했다. 실록은 원래 공평한 기록이 되도록하기 위해 임금이 죽고 그 신하들도 죽은 후에 사관들이 승정원 일기를 참고로 그 임금의 공과 덕을 기록으로 편찬했다(李朝實綠). 덕이 많은 임금에게는 종(宗)자를, 공이 많은 임금에게는 조(祖)를 이름에 달아 놓았다. 이방원은 자기가 죽기전에 실록을 편찬하자고 했다. 생생한 기록이 되려면 증인들이 죽은 후가아니고 살아 있을 때 써야한다고 막무가내로 사관들의 반대도 소용이 없었다. 이방원은 많은 사람을 죽인 죄가 있어 자기가 어떤 임금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지를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방원은 바람둥이 장남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세종을 4 대임금으로 대를 물려준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 될만 하다. 며칠전 1월29일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통령의 시간”이라는 회고록이 서점에 나왔다. 현직에서 떠난지 만 2년만이다. 대통령의 회고록이 나오면 통상 2.3일이면 1만부씩 팔린 것에 비하면 MB의 800페이지나 되는 회고록은 거의 일주일이 되었는데도 불과 2,200부가 나갔다고 한다(교보문고). 인기가 별로 없는 모양이다.
나 잘났다 네탓이다. 동아일보 100자 평에 “대통령의 시간”은 “나 잘났다”와 “너 때문이다” 두 종류의 이야기로 이루워졌다는 서평과 함께 MB는 깃털처럼 가벼운 인물이라고 했다(곽민찬). 국가의 연속성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남북관계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나라 정상과 했던 귓속 이야기까지 폭로하며 자기를 변명하며 잘못은 남의 탓으로만 --(중략).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쓰여진 납북간에 있었던 비선 접촉 얘기는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만난 데서부터 개성에서 실무 접촉한 얘기와 한 중 정상회담에서 오고 간 말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 있다. 2012년 1월 9일 후진타오중국 국가주석에게 국빈만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통일이 되면 한 중은 1300Km의 국경을 마주하는 가장 가까운 나라가 됩니다. 그때 미군은 지금 주둔하고 있는 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호진타오 주석은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만 되겠습니까? 라고 답을 했다고 했다 (호진타오의 이 석연치 않은 대답은 그 때 가 봐야한다는 뜻임에 틀림이 없다. 당신은 미국대통령도 아닌데 장래에 있을 미군주둔에 대해 말하는 건 주재에 넘는 애기로 본것이 틀임없다).
싱가포르 비밀 실무회담 김대중 조문단이 다녀 간후 북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현인택 통일부장관에게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8/28/2009). 베이징 한 중일 정상 오찬회(10/10/09)에서 원자바오 당시 중국 총리가 “내가 듣기로는 남 북 실무자들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논의가 오간것으로 알고 있다”며 내가 김정일을 만났는데 정상회담을 원하고 있습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대통령은 조건없이 핵문제를 비롯해 허심탄회하게 얘기 할수 있다면 만날 의사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의 뜻을 정확하게 (김정일에게)전하겠습니다. 그후 김양건 비서가 싱가포르에서 비밀리에 실무회담을 하자고 해서 대가성은 없다는 지침을 주고 임태희 노동부장관을 싱가포르에 보냈다(10/17/09). 김양건을 만나고 있던 임태희가 핵문제는 “폐기”가아니라 공동노력차원 수준으로는 할 수있다고 한다며 국군포로도 영구 귀환이 아니라 고향방문으로 할수 있다고 했고 정상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해 비료 등 대규모 경제지원 약속이 필요한다고 보고 해서 그러면 회의를 중단하고 공식라인에서 정상회담 여부를 결정하도록 통일부-통전부가 회담할 날짜를 정해오라고 했다고 했다. 2009년 10월24일 태국 아세안 +3 정상회담에서 만난 원자바오 총리는 김정일이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 왔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북한의 요구조건이 너무까다로워 나는 조건 없는 회담을 원단다고 했다. 원자바오는 “제가 볼 때는 그 조건이 김정일의 생각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각하의 뜻을 잘알고 있으니 김정일과 연락 할 기회가 있으면 각하의 그런 뜻을 전하겠습니다고 했다.
이대로 가면 나는 죽는다. 개성 통-통 실무회담 싱가포르의 비밀회담에 이어 이번에는 공식라인으로 2009년 11월7일 개성에서 통-통(통일부와 북의 통일전선부)회담이 열렸다. 북측은 싱가포르 비밀회담에서 임태희 노동장관이 서명한 합의서라며 세장이나 되는 합의서를 내놓고 정상회담 조건으로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자금 100억 달러를 제공하는 것으로 돼 있다며 남한 정부가 실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임태희는 싱가포르 비밀 접촉에서 회담이 결렬되자 임태희가 통-통정식 채널 회담 날짜를 정하자고 김양건비서에게 요구하자 김양건 비서는 “(결과물 없이) 이대로가면 나는 죽는다”며 북측이 정리해 온 회담 내용 두장 짜리에 잘못된 몇 몇 부분은 두줄로 지우고 옆에 새로 덧붙이기도하고 이건 맞다 이건 아니다는 식으로 수정해서 제 사인을 했다며 그것은 분명합의서는 아닙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진전 없이 개성 통-통접촉도 결렬 됐다고 했다. 11월에 연평도 포격이 있은 바로 후인 12월 5일에 북측인사(류경 안전 보위부 부부장)가 대좌 1명, 상좌 1명과 통신원 2명을 대동하고 서울에 왔다. 이 인사(류경)는 장군님 메시지를 가지고 왔는데 대통령이 왜 나를 만나지 않느냐고 거칠게 항의했다(류경을 상대한 사람은 김숙 국정원 제1차장). 이대통령은 알아보니 류경은 김정일의 서한도 없었고 격도 맞지않아 만나지도 않았다고 했다.
방남 했던 류경 온 가족 공개처형 이 대통령은 2011년초에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그 인사가 공개처형 됐다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류경은 김정일과 술을 같이하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남 북접촉에서 비밀누설을 했다는 죄목으로 온 일가가 다 처형 됐다. 재일교포출신인 며느리는 당의 강제지시로 이혼을 시켜서 죽지는 않았다고 아사히 신문 특파원 마키노가 증언했다. 이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김정일은 나를 계속만나고 싶어했다며 그 목적은 남북대화와 통일이 아닌 김씨왕조의 권력을 지키고 권력을 세습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 회담을 요구했고 결국엔 임기중 정상회담은 이뤄지지못했다고 했다고 “원칙론”을 피력했다.
이명박 여러사람 뺨 때리고 스스로 매벌어 새누리당의 친이계 정두언은 이명박대통령의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이대통령의 회고록은 “모든사람 뺨 때린 격으로 매를 스스로 벌었다”고 했다. 국회가 지금 이명박 대통령의 치적이라던 “4대강과 국외 자원 투자”에서 수조원의 국고를 낭비한 것에 대한 국정감사를 앞에두고 이명박을 벼르고 있는 이때 남 뺨 때리는 회고록이 나온 것이다. 정두언의 말대로 회고록에서 이명박대통령의 뺨을 맞은 사람은 국내 뿐아니라 중국의 호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를 비롯해 연평도 포격이 있은 직후 다이빙궈 중국 외교부장이 이명박대통령에게 북한이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나면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 했다는 귓속말로 일러준 말도 공개 했다. 이는 1961년 맺은 조 중 우호조약과도 관계되는 조 중간의 심각한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한 미 FTA 협상때 광우병 때문에 소의 월령(月令)이 문제 됐을때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노무현사이에 이면합의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으로 FTA를 전담했던 김종훈 현 국회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이면합의는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이명박 회고록을 정면 거부했다. 이명박은 부시가 자기를 친구라고 부른다며 좋아 했지만 결국 부시의 뺨도 때렸다. 남북관계가 예민한 이때 대남 통일전선부 부장 김양건은 김정은에 의해 통일전부부장으로 신임을 받은 사람으로 대남관계의 최고 책임자다. 그가 싱가포르 비밀회담에서 “이대로 성과물 없이가면 죽는다”고 한 말까지 회고록에 썼다. 남 북대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김양건도 류경일가가 처형당한 것 처럼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돈주며 정상회담 애걸. 비밀 지켜 달라 북한 국방위원회대변인은 조선 중앙통신과 (6/1/11)문답형식으로 남북 비밀회담을 폭로한 바 있다. 당시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 홍창화 정보원국장, 김태호 대통령전략비서관이 남북 비밀 접촉에 나왔다며 “이들은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두루뭉실한) 절충안이라도 만들어 내 놓자고 하면서 우리측에 제발좀 양보해 달라고 애걸 복걸했다”고 주장했다. (중략)이명박 지시에 따라 이 비밀접촉을 주관하는 통일부 장관 현인택, 국가정보원장, 대통령실장 그리고 이자리에 파견 된 사람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북측도 비밀에 부쳐달라고 간청했다고 주장했다. 돈봉투까지 내놨다는 것까지 폭로했다. 정상회담을 빨리 추진시키자며 돈 봉투까지 거리 낌없이 내놓고 유혹하려고 꾀하다가 망신을 당하였다며 (천안함과 연평도에대한) 사과를 전제로 한 최고급회담 제의는 논의할 필요없다 당장 서울로가라고 했다고 했다(동아일보).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1만달러를 지급했다며 교통비와 호텔비로 북측관계자 5명에게 1명당 2천불씩 계산해서 주었는데 이것이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린것 같다고 했다(조선일보). 당시 김황식 총리는 대정부 국회 질문에서 정상회담 애걸과 돈 봉투로 매수한 것이 아니라 연평도 사건에 대해 사과를 유도하고 명분있게 (북이)나올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했다. 현인택 장관은 전대미문의 무책임한 폭로행태이자 저잣거리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라며 남한정부를 곤경에 빠트리고 남남갈등을 유도하는 전술이라고 대응했다. 후에 이를 폭로한 자들은 숙청당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 칼럼은 www.seoulvoice.com과 www.cafe.daum.net/mkchicago 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국민속 연구원 제416호 charak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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