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11 15:14
천주교의 종교재판과 종교혁명. 유럽의
인쇄 혁명은 한국사람 석주명 왜 종교는 과학자를 재판하나? 나는 왜 기독교(가톨릭)가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을 박해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알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문헌을 읽고 천주교가 과학자들을
구속하고 종교재판을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거기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크게 한 몫을 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달은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다는 코페루니쿠스의 우주론(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서로 배치 되었는데 가톨릭교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흡사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지동설”을 배척하게 됐고 지동설은 이단이 됐다. 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과 이단 지동설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공전)있는데 한바뀌 도는 시간은 365일이고 지구자체도 도는(자전)데 한바뀌도는시간은 24산이 걸린다는
것이다. 지동설은 일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구가 돈다면 지구상에 있는 물체들은 지상에서 공중우로 떨어져 나갈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지동설은 허위라고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누구나 쉽게 이해 할수가 있어서 누구나 수궁이갔다.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고정 돼 있으며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어서 해가지고 뜨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달을 경계로 하늘에는 천상계가 있고 그아래는
지상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동설은 이에 배치되는 것이어서 가톨릭신자들이 믿고 있는 별천지 천상계를 부인하는 것이 됐고 교리상 지동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이단자가 됐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종교계의 지지를받게 됐다. 알리스토텔레스는 천주교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수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384년에 그리스 북부 도시 스타기리에서 태어 났다. 당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점령돼 있었던 때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의 주치의였다. 그때부터 아리스트텔레스집안은 마케도니아 왕가와 인연을 갖게 되었으며 18세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수도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진학하게 됐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후부터
프라톤이 죽을 때까지 20년간 연구를 같이하는 스승과 제자사이가 됐다. 그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자(기원전 356-323)를 만나게 되었고
3년 동안이나 그를 가르쳤다. 왕자는 20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페르시아 등 주변국을 점령하고 멀리는 인도에까지 진출하면서 70여곳에 도시를 세우고 아사아 아프리카 유럽이 만나는 지중해 연안에 자기 이름을 딴
수도 알레산드리아를 세웠다. 이도시는 이집트 그리스등의 예술 학문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박물관 도서관이 생겼으며 천문대, 기숙사까지 딸린 연구기관이
있는 문화도시가 됐다. 도서관에는 세계 각곳으로부터 50만개의 파피루스(원시적 종이) 두루마리가 수집 돼 있었고 박물관에는 100명이 넘는 석학들이
모여 연구를 했으며 아프리카, 페르시아(이란), 로마, 인도, 아랍 등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인구가 60만이 넘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이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 리시움(lyceum)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거의 모든 학문을 막라한 천문, 물리, 논리, 정치, 윤리, 철학, 심지어 동물학까지 연구하는
대학자가 됐다. 그러자 기세를 떨치던 알렉산더 대왕이 33세로 죽었다. 그로 부터 받던 재정지원이 끊겼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다음해에 62세로 죽었다. 단군시대사람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활동하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이며 우리나라로는 고조선 말기에 해당하는 아득한 옛 날이다. 그가
60평생을 살면서 연구한 학문은 지금까지 2000 여년동안 내려오면서 종교와 과학에 영향을 미쳐 내려 왔으니 그의 깊은 학식과 철학은 그 깊이로
볼 때 신이 낸 사람임에 틀임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책들은 방대했으며 제자들이 정리한 책들도 사후 200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만들어 졌다. 그가 정리해 남긴 과학과 연관 된 논리학, 우주 물리학, 생물학 등에 대한 연구는 학문의 뿌리가 됐다. 17세기에 와서 뉴톤의 중력에 대한 발견과
다윈의 진화론 등도 아리스트텔레스의 학문을 연구하는 데서부터 시작 됐다고 한다. 그 전에 있었던 피다고라스, 플라톤 등은 추상적인 면이 많았지만 아리스트텔레스는 이론적으로 다 상식에 맞았고 일상생활과도 잘 맞아떨어져서 후학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했다. 우주는 천상계와 지상계로 2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눈으로 볼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는 우주세계를 달을 경계로하고 천상계와 지상계로 2분하고 천상계는 영원불변한
세계이며 지상계는 불완전한 세계로 끊임 없이 변화하는 셰계라고 정의했다. 또 천상계와 지상계는 엄격하게 분리 된 세계이며 물질적으로 다른 원소로
이루워 져 있기 때문에 서로 교류가 불가하다고 했다. 지상계를 이루고 있는 물. 불, 흙, 공기 등 4가지 원소는 천상에는 없으며 천상계에는 영원불변의 제5의 원소 “에테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영구불멸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고안해 냈다. 이 에테르는 다른 원소와도
결합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오직 순수한 상태로 천상계에만 존재한다고 했다. 이부분은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별도의 딴세상, 알지못하는 신의 세상과
공통점이 있다. 하늘과 땅으로 나누는 우주관은 당시 사회의 공감을 얻게 됐고 중세의 종교인들의 통념이 됐다. 지금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우주론이
틀렸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카페루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기까지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우주 물리학에서 뿐아니라 생물학까지도 크게 기여
했다. 그는 동물을 피를 갖인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로 분류하고 피가 있는 동물을 또 척추가 있는 동물로는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로
분류하면서 물에사는 고래를 포유류에 포함시켜 분류했다. 그리고 새끼를 낳는 동물과 새처럼 알을 낳는 동물로 나누었다. 무척추동물에는 갑각류, 두족류,
곤충과 거미, 조개 산호등을 이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520여종의 동물을 연구한 분류학은 18세기까지 2천년 동안 현대동물학자(칼 린네)가 나올때까지
생물 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됐다. 르네상스는 유럽에서는 구박 뗑이
중세에 유럽과
그리스에 있었던 문화유산이 이태리로 흘러 들어가 루네상스시대가 이태리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케란젤로 등 많은 루네상스 사람들은 거대한 성당 건물에 조각을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르네상스의 이태리풍 인문주의는 유럽여러나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이태리 사람들과는 기질과 성격이 낭만적이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문화를 배척해 왔던 북유럽사람들은 교황이 예술과 성당건축에 막대한 돈을 쓰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드디어 독일에서 천주교를
개혁하자는 요구가 촉발했다. 성경학자 마틴 루터(1483-15460)는 더이상 교황의 부패를 볼수가 없다고 했다. 교황청이 돈을 벌기 위해 면죄부indulgence를
팔기시작(1513년)하자 마틴은 이에 저항했고 이 저항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돼 천주교는 구교와 신교로 갈리어 처절한 싸움이 시작 됐다. 투터는
천주교교리를 반대했으며 예수에대한 믿음으로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사람 석주명의 인쇄술과종교혁명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누구나 읽을 수 있게 싸게 보급했다. 이렇게 되는데는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이 크게 기여 했다. 독일인들은 싼 값으로 성경을 직접 사서보고 구교에 대한 반항이 더 크게 싹 텄다. 구텐베르크는 인쇄를 많이하기 위해 활자를 만드는 주형틀을 개발했다. 쇳물을 주형틀에 쏟아부어 활자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발전시켰으며 압축하는 기계도 개발했다. 잉크와 종이도 개발 해 인쇄술이 조선과 중국을 능가 했다. 당시 유럽의 인쇄술과 종이제조는 동양이 앞서 있었다. 구텐베르크가 이렇게 되는데는 그의 밑에서 그를 도와 주조 활자 기술을 개발한 조선에서온 사람 석주명이 있었다. 석주명은 세종대왕의 명을 받고 햇시계(자격루)를
만든 장영실(1390-1450)의 조수다. 장영실은 재주꾼으로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어가도 만들었다. 하루는 세종대왕이 장영실이 제작한 어가를
타고 외출을 했는데 어가가 부서졌다. 그래서 쌍놈을 궁으로 데려다 벼슬까지 주었다고 장영실을 못마땅해 하던 사람들이 탄핵을 했다. 이 때 장영실은
중국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장영실은 이조 실록에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이고 어머니는 동래의 기생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석주명은 구텐베르크 인쇄소에 있으면서 독일 처녀와
결혼했고 중국에서 혜어진 장영실을 만나러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석주명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에서 한 일은 주조활자를 만들때 납을 녹여서
주석을 얼마의 비율로 섞어야하는지와 잉크배합에 대한 실험을 수도 없이 실패를 거듭하며 성공했다. 그가 처음으로 인쇄한 것은 사도 행전이다(1445년). 쿠텐베르크는 장사꾼이었고 기술자는 석주명이었으며 그는 석주명 때문에 돈을 억수로 벌었다. 석주명이 장영실 밑에서 익혔던 인쇄술이 구텐베르크손에
들어가 독일 인쇄 혁명을 일으켰고 그가 인쇄한 성경은 종교개혁을 빠르게 확산시켰으며 가톨릭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종교개혁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표출이 됐으며 유럽뿐아니라 범 세계적으로 종교가 혼란에 빠지게 했다. 16새기와 17세기동안에는 피의보복이라고 할 만큼 종교전쟁이 세계를 휩쓸었다. 한나라의 통치자의 종교이념에 따라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리고 목숨을 잃고 희생 당했다. 교리에 안맞는건 다 이단 이 때는 무엇이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다 이단이었다. 자연(自然)과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도 우주 창조론과 배치 되기 때문에
교리에 어긋난다고 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태양계를 관찰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아리스토텔텔레스의 천상계 우주론을
뒤집었다. 코페루니쿠스의 3촌은 천주교 주교였고 코페루니쿠는 이태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천주교청에서 일을 하며 우주문리를 연구한 천주교 신자다. 갈릴레오는 32 배까지 확대 해 볼수 있는 망원경을 발견하고 태양계를 관찰하며 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과 태양계우주론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뉴톤아이삭은
만유일력(중력)을 발견해 지구표면에 있는 물질들이 공중으로 흩어져 날아가지 않는 지구의 자력과 중력을 증명했다. 1616년 종교재판소는 코페루니쿠스의
우주론을 이단이라고 선포했다. 지동설은 잘못 됐다 용서를빌다. 갈릴레오는 69세에 죄인으로 로마로 끌려가 감옥에 같혔고 종교재판은 이단자로 판결을 내렸다. 1633년 갈릴레오는 살기위해 이미 코페루니쿠스
우주론을 버렸다고 자백했다. 저의 잘못된 개념과 이단 사상(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을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고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고 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이후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가택에 연금된채 살았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과학사p228).
종교재판은 잘못됐다 천주교는 시인 천주교의 이런
입장은 1822년에 이르러 지동설을 말해도 처벌하지 않았고 1825년에 와서는 코페루니쿠스, 갈릴레오의 책들을 금서목록에서
풀었다. 1893년 교황 레오 13세는 과학과 종교와 관계를 다시 정립하며 1992년 10월 31일 길릴레오가 죽은지 350년이 지나 교황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재판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범한 잘못을 공식적으로 시인했다. (이 칼럼은 www.seoulvoice.com과 www.cafe.daum.net/mkchicago에서 볼수 있습니다) <한국민속
연구원 제416호 www.charakw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