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25 12:19
김종필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청문회. 20세기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호찌민 남노당 청문회 한국 역대
대통령중에서 아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인기 여론 조사에서 일등을 놓친 적이 없다. 지금 한국 대통령은 청문회를
거치지 않고 선거를 통해서 된다. 하지만 국무총리는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만일 지금 박정희가 총리로 지명을 받고 청문회를 한다면 총리가 될수
있을까? 김종필은 어떯까? 택도 없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군인으로서 공산당원이었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며(백선엽 예비역 원수가 무죄 석방)그의 친형인 박상희도 빨갱이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 김종필은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의 남편이고 박정희의 족하 사위 이기 때문이다. 또 박상희의 친구로 월북
했던 황태성이 5.16혁명이 나자 김일성과 상의하고 남쪽으로 잠복해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려 했기 때문이다(간첨으로 사형). 김종필은 9 선 의원으로 국무총리를 두번이나 했으며 한때 3김 정치로 한국정치를 풍미한
정치 9 단이다. 5.16혁명의 주체였으며 공화당과 중앙 정보부를 창설하고 정보부 부장을 하면서 나는 새도 떨러트렸던 권력자였다. 1965년 한
일청구권 협상으로 “6.3 학생데모를 유발시켜 6.3 반정부세대를 탄생케 하는 등 3김 정치 시대를 열게한 한국정치의 풍운아다. 그의 처 박영옥이
지난 21일 86세로 세상을 뜨자 대통령을 비롯해 왕년의 정객들과 현직 거물급 정치인들이 줄을서 조문했다. 김종필자신도 죄졸증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거동이 불편한 중에 있다. 노정객 김종필의 한 맺힌 정치일생 하지만 조문객들마다
그에 맞는 맞춤 형(型) 대화를하며
과거사를 회고하는 등 현직 정치이들과도 그에 맞는 훈수도하고 부탁도하고 충고하고 격려도 하며 덕담도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자신이 늘 말해
온대로 자칭 만년 2 인자로서의 자세를 보이며 조문(弔問) 정치를 했다. 누구도 그에게 반론이나 귀에 거스르는 대화는 하지 않았다. 박대통령의
조화를 들고 온 김기춘 청와대 비서 실장에게(부산 초원복집 우리가 남이가 사건 의 주인공)는 김실장이 퇴임하더라도 대통령을 가끔 찾아 뵙고 외롭지
않게 해 달라 그자리가 외로운 자리라며 박대통령의 인격이 어떠하십니까라고 대통령의 근황을 묻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기춘 실장은 제가 감히 무어라고
할수 ---(대통령께서는) 나라 생각밖에 없으신 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JP는 (박대통령에대해) 아버지(박정희)와 어머니의 좋은 것만 반반씩 닮아 결단력과 판단력이 있다고 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문재인이
현대사(史)에 큰일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자 “내각제잘하면 17년도—- 더 권력을 맡을수도 있다”며 그러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수 있다. 대통령
단임제, 대통령책임제하에서는 큰일못한다. 내 일찍이 정치인은 허업(虛業)이라고 그랬어, 정치인이 (얘써)열매를 맺어 놓으면 국민이 따먹지 정치인이
따먹는 건 하나도 없어, 정치인이 이열매를 따 먹겠다고 그러면 교도소밖에 갈곳이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에게는 내가 내각제 주장하다가 망한 사람이지만 대통령 5년동안 뭘하겠느냐 시간이 모자란다, 대쳐 전 영국 총리는 데모하고 파업하는 것을 12년 재임하면서 고쳐 놨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직언 하지마라 옆에 있던
한 배석자가 이완구총리에 대해 질문하자 JP는 (이완구가)박대통령에게 직언하고 비판하겠다고 했는데 그런소리 일절입에
내지말라고 했고 할말 있으면 조용히가서 건의하고 밖에나와서 그런
얘기했다고 자랑하지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김무성새누리당 대표에게는 정상(대통령)은 외롭고 괴롭고 그런 고독한 자리인데 대통령 잘좀 도와드리세요. (김무성 대표의 모습은)아주 걸음걸이 부터 언사 구사하는 태도도 유심히 보고 있습니다만 여유가 있어서 좋아요, 대(大) 여당 지휘자니까 그런 여유가
있어야지라고 덕담을 잊지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이이었던 문희상의원에게는 여야라는게 (국회)안에서는 싸우지만 밖에 나와서는 술먹고 경사가
있으면 같이 기쁘게 놀고 그렇게 가야하는데 근래는 여야간에(또 계파간에)저녁먹는것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해 현실 정치에 불만도 했다. 호찌민은 20세기 세계적인 지도자 한 조문객(기자인듯)이 20세기 세계지도자중 괞찮은 지도자를 꼽아 달라는 질문을 하자 JP는 두명을 지목했다. 한명은 2차 대전때 영국총리
처칠, 또 한명은 월남의 호찌민(胡 志 明)을 꼽았다. 그는 공산주의자지만 참위대한 사람이다. 미국을 이겨 통일을 이룩했으니 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머지는 다 비슷해요라고 말했다. 호찌민은 파리에 망명해 있을때 접시딲기에서 주방장을 했던 민족주의자였다. 김종필 장인은 대구 빨갱이였다 박정희 전대통령(당시 국방부소령)이 1950년 전쟁중에 (김종필 대위에게)“내 조카딸(박영옥 당시 교편)봤지? 어때 자네에게 도움이 될꺼야
데려갈 수 있어? 본인(박영옥)이 좋다고만 하면 나는 좋습니다
했다. 그렇게 해서 박정희는 친 조카딸 중매를 했고 이들은 1951년 부부가 됐다. 그리고 박정희와 육영수는 이보다 한해 앞서1950년에 결혼
했는데 김종필이 대구 같은 하숙집에 어머니와 같이 있던 육영수를 중매했다. 박정희는 당시 본처 김호남과 이혼 한 상태였고 자식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의 장인 육종관은 충남 옥천의 큰지주의 아들로 소실이 4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한집에서 살림했다. 그중에 춘천댁이라부르는 제일 젊은 소실은
춘천에서 온 일본 여자였다. 육영수는 육종관의 본쳐소생의 두째 딸이었고 아버지 말을 제일 잘 들어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육종관은 이혼하고 자식이
딸린 박정희와 혼인을 하겠다니 혼비백산했다(전실자식을 육영수가 한때 돌보았다고 함). 육종관은 혼인을 번대했지만 육영수 어머니가 사주를 봤더니
혼인하는게 좋다는 점꽤가 나왔다. 어머니가 우겨 혼이이 성사 됬다. 그 후 육종관은 죽을 때까지 본처와 말도 하지 않고 별거하다 죽었다. 육종관은
본처와 소실 사이에서 22 남매(남 12, 여10명)를 둔 자식부자였다. 하지만 본처와는 늘 불화가 자잤고 전쟁중에 육영수와 대구에 내려가 있을때 김종필이 박정희를 중매했다. 김종필의 장인 박상희는 제정때부터 독립운동을 했으며 대구에서는 잘알려진 유지다. 1934년 민족(紙) 중앙일보 대구 지국장, 1935년 동아일보 구미지국장겸 기자, 해방되던 해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구미지부를 결성하고 11월에 전국 인민 위원회 선산대표, 1946년 10월 대구 빨갱이 항쟁(해방후 최초 빨갱이폭동)이
일어나자 구미 경찰서를 공격했다. 이때 분노한 군중(빨갱이)들이 경찰들을 살해하는데에 반대해 경찰들의 인명살상을 막았다. 그러나 10월6일 이
항쟁사건을 무마하고자 중재에 나섯다가 이를 진압하러 출동한 우익단체와 경찰이 발포한 총탄에 맞아 살해 됐다. 그러니까 박정희도 그의형 박상희도
해방후 죄익에 발을 디뎠다. 김종필은 그런 집안의 딸과 결혼 한 것이다. 그러면 김대중 전대통령은 어떤가. 그도 해방후 공산당에 입당했다 전향한
사람들의 단체인 보도 연맹이란 단체가 있었는데 여기와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가, 그의 장인은 앞을 못보는 맹인으로 인민군
공산치하에서 부역한 죄목으로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같혀있다 죽었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됐지만 만일 이들이 총리로 지금 지명 됐다면 모두 낙방했을
것이다. 세상은 흘러 흘러 많은 변화가 일어 났다. 총리하기가 대통령하기보다 더 어려운 세상이 됐다. 대통령도 되고 나면 만사가 쉽게 풀릴 것
같지만 그런것 같지는 않다. 대통령을 하면 뭘하나 거품같은 거지 대통령을하면
뭘하나 편안하게 살다 가는게 승자다(김종필) 특히 박근혜대통령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많이 든다. 명일이 돼도 사랑하는 동생들도 못만나고 비명에 간 아버지 어머니 묘역에도 맘대로
가지 못하고 두 대통령을 배출한 영광스러운 박정희 대통령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외아들 남동생과 장조카를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않고 시누가 또
쌍둥이를 잉태했는데도 만나지 않고 있다. 이게 무슨 선진국의 대통령인가. 온 집안 친척 부모현제들이 헤여져 있다가도 명절이면 만나서 밤을새우며
덕담도하고 세배도 하고 제사도 지내는 게 우리 5 천년의 역사의 가정문화고 자랑꺼리다. 만일 박대통령이 그렇게 했다면 박지만과 정윤회, 십상시와
같은 근거 없는 일로 대통령이 국민들의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일가 친척도 만나지 않고 적막한 청와대에서 두문 불출하고 있는 것은 인륜을 어기는 것이며 우리 고유의 미픙양속과 가정윤리
도덕을 대통령이 앞장 서 깨는 것이다. 김종필은 사촌처남인 박지만이 조문을 와서 부인(서양희)이 쌍둥이를 임신해서 같이 못왔다고 하자 아버지(박정희)가
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라고 말 했다. 옆에 있던 한 친지가 박대통령이
박지만회장을 청와대에 못들어 오게 하는 것은 좀 비정상이라고 말을하자 JP는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말을 막았다고한다. 박대통령도 아무리 나라
일만 생각한다고 하지만 동생 족하들을 보고 싶을 것이고 걱정도 할것이다. 그래서인지 동생들이 방황에대해 그게 정상인지 내가 비정상인지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이 매우 불편하고 애석하다. 대통령은 우리 미풍양속을 잘 지켜서 국민앞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런 것이 우리
민족의정신문화다. 박근혜대통령은
여자다. 가정문화를 더 소중히 여겨야한다. 김종필이 말한대로 여자기기때문에 남자와 달리 섬세한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아무리 정치가 비정하다지만
인륜을 거스리는 것은 안 된다. 이완구총리와 우유근의 눈물 김종필 전
총리, 정치풍운아 그가 한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쓸만한 구석이 많다. 특히 여 야간에 국회내에서는 싸워도 밖에서는 술도 같이하고
경사가 있으면 서로 기쁘게 놀고 해야 하는데 여 야간에(계파간에)저녁도 안하는 것 같다고 정치계에 한 말은 대결하고 싸우기만 하는 국회의원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크다. 호찌민을 20세기의 지도자라로 소꼽은 것도 분단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귀담아 새겨야할 말이다. 지난 24일 이완구 총리는 국회를 방문해 우유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 총무를 만났다. 이 두사람은
정적이다. 하지만 여 야당 원내 총무로 세월호 특별법을 마무리 했고 매년 법정기일을 넘기며 싸우던 예산안 처리를 기간내 처리했던 죽이 잘 맞는
정적이고 동지(?)적인 원내총무였다. 우유근 야당 원내총무는 이총리를 보자 “정말 마음이 아팠다. 총리 인준을 도와주지 못해---라며 말을 잇지
못했고 눈가에는 눈물을 비쳤다. 이를 본 이완구 총리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에 대해 이총리는 “당차원에서 반대도 있었지만 우원내대표가 저를 쳐다보는 애처러운 눈초리에 가슴이 뭉클했다”며 “우총무는 귀인”이라고 덕담을 했다. 이에 우총무는 “깊이 간직해야할 파트너이자 훌융한 인생의
선배라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고 화답했다. 이 두사람의 눈물을 놓고 비뚤어진 동업자가 아니냐는 둥 공식 석상에서 여야간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인것은 잘못이라는 둥, 야당이 전부 반대표를 던진 총리를 돕지못해 미안 하다는 것은 야당 원내 총무로서 할말은 아니라라는 둥 비판이 빗빨쳤다.
한국이 세계에서
분단국으로 기록을 세우고 있는 이때 한반도 분단을 통일 하는 대통령은 통일대통령으로 호찌민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나머지(대통령들은)는 다 비슷한 도토리 키재기 대통령에 불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칼럼은 www.seoulvoice.com과 www.cafe.daum.net/mkchicago 문경란에서 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