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26 12:08
임진왜란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 항왜(伉倭) 김충선
장군.
지금 한 일관계는 50년 수교 이후 최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분단과 한 미 동맹 관계 때문에 안보에 관한 한 한 미일 공조는 흐트러짐이 없다.
지난해 12월에 북 핵 도발에 대비해 한미일 정보교환을 서로 긴밀히 하면서
북한 핵도발을 막아야 한다는 공동 운명에 공감하고
한 미일 정보교환 협약을 맺어 공조를 다짐했다.
북 핵 때문에 한미일 안보 관계는 완전히 깨질 염려는 없다.
역사왜곡만 해결되고 일본이 한국을 한수내려다보는 것만 해결되면
언제라도 이웃 나라로서 우의를 되 찾게 될 것이다.
임진왜난 때 왜군 조총부대를 이끌고 조선에 나온 부대장 “사야가”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이 싸움은 명분이 없다”며 투항해 조선군에 조총만드는 기술을 알려주는 등 도움을 많이 주었다.
선조 임금은 사야가에게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 했다.
지난 2월13일 일본 여당인 자민당의 총무회장(나카이 도시히로)이 방한 해 “한일교류 행사”에 참여해
김충선의 기념비가 김충선장군의 고향이고
자기 고향이자 지역구인 와카야마에 세웠다며 이는 한일 우호의 상징이라고 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충선장군의 후손 4명이 참석했다.
일본군 조선 군에 투항
일본의 아베 총리는 방위 청(廳)을 부(部)로 격상시켰다.
북한 핵 문제와 한미 FTA 협상으로 한국정계가 어수선한 틈을 타
(날치기로)아베총리는 일본의 방위 청은 부로 승격했다.
이는 미국의 승인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처사이며
이일은 중국과 한국이 앞장서 반대했어야 했다. 방위청이 부로 격상했다는 것은
일본은 앞으로 국방력을 확충하겠다는 것이고
북한의 핵실험을 구실 삼아 핵 개발도 할 수 있다는 예고이기도 하다.
일본은 핵 없는 나라에서 핵 보유 강대국이 되어 동양의 호랑이로 다시 등장할 길을 열기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을 잃게 되면 동양을 잃게 되고
동양에 대한 발언권도 많이 약해 질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이제 일본에 대해서
전에 비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어벖게 됐다.
아베는 이런 미국을 잘 간파하고 있다.
일본은 한반도 정세를 등에 업고 큰 덕을 보고 있다.
대구광역시 달서군 가창 면 우륵동에 일본 관광객들이
매년 1천 여 명씩이나 찾아왔다.
이 곳은 일본의 ‘사야가’라는 장수가 임진왜란 때 조선 군에 투항하여
1624년 72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살던 곳이다.
이가 바로 선조 임금으로부터 김 충선 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은 김해 김씨의 모하당 김 충선 이다.
우륵 동은 그가 녹동(사슴이 노는 동네)이란 글 빵을 세워 글을 가르친 곳이며
지금은 모하당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그가 이곳에 살면서 두고 온 일본의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가 있다.
남풍 불어오면 고향이 그립네/조상은 무사한지/일곱 형제도 무사한지
봄에 꽃을 보아도 고향 생각/어느 때인들/고향생각 없을 손가
구름을 보며 고향을 생각하네/일가 친척은 살아 있을까
세상을 하직했을까/고향 산천에 대한 생각 끊일 날이 없네
고향집에 불행이/나로 인해 왔으니/세상에 제일 큰 죄인
나 이외 또 누가 있으랴
일본장수 가등의 좌 선봉장으로 조선 땅에 상륙한 사야가(沙也可)는
조선 농부 일 가족이 피란 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감동했다.
농부는 늙은 노모를 등에 업고 아내는 피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산길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저렇게 어질고 착한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몇 일 밤을 고민하다 휘하장졸 500명을 이끌고
전투한번 하지도 않은 채 경상도 병마절도사 의병장 박진에게 투항하여 조선 의병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 의병과 같이 동래 양산 기장 등에서
왜군들과 싸워 한 달 동안에 무려 여 덜 번이나 이기는 큰공을 세웠다.
조선 의병장 박진은 그의 충정과 무훈을 선조 임금에게 알리었는데
선조 임금은 사야가를 친히 조정으로 불러 그의 일본 이름의 모래 사(沙)를 따서
일본의 모래가 현해탄 바다를 건너와 금(金)이 되었다면서
성을 김해 김가로 이름은 충성 충(忠)자를 부쳐 김 충선 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는 조총 만드는 기술과 화약 만드는 기술을
조선 군에게 가르쳐 총포부대를 창설하고
의병장 곽재우와 연합하여 경주에서 싸워 승리하고 정유재난 때는 명나라 원군과 같이 울산에서
일본 총대장 가등의 휘하 진지를 섬멸시키기도 했다.
김 충선은 1600년에 진주목사의 딸을 아내로 맞아 우륵 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그 후에도 김 충선은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하는 등
북방 경비에 10년씩이나 자청해 변방을 지켰고 이 괄의 난을 평정하기도 했다.
김 충선이 조선으로 귀순한 이유는 풍신수길이 일본을 천하통일 할 때
이에 반기를 들었던 장수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풍신수길에게 정복당한 철포 부대에서 항전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조선의 유교와 문화를 동경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경상도 병마절도사에게 보낸 그의 글 마지막 부분에는
‘저의소원은 조선의 예의 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서 예의의 나라, 성인의 나라
조선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 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조실록과 본인 자신이 쓴 모하당 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차대전 때까지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 충선은 무시되었었으나 4백년이 지난 지금 그는 평화론 자로
다시 각광을 받으며 연구하는 단체도 생기고
그의 사상과 행적을 일본의 매스컴이 특집으로 보도 한일 도 있다고 한다.
일본 교과서에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고 한다.
왜병이 침략해 7년 동아이나 국토를 유린하며
난동을 부렸으나 일본은 승리하지 못했고 임진왜란은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는 데
김 충선과 같이 투항하여 조선을 도운 왜병이 1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투항한 왜군을 ‘항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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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 연구원 charakw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