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6 07:53
온데 간데 없는 통일 담론. 통일을 하지 않을 양이면 말이나 하지 말지. 통일 담론은 어디로 갔나! 통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답답하다. 외국사람들이 한국을 바라 볼때 한국사람들이 진심으로 통일을 하고 싶어 하는가 의문을 갖고 있다. 의문이 크게 확산 되지나 않을까 걱정 될 때가 많다. 사드 한국배치문제는 미국 국방장관 카터가 서울에 와서 사드는 아직도 생산단계(개발)에 있기 때문에 배치를 논의할 단계가 아니라고 언급함으로서 사드배치 논란은 싱겁게 무기(無期)가 됐다 (미국은 이미 택사스와 괨에 실전 배치 했음에도). 중국이 주도한 은행 AIIB에 한국이 가입 할 것이냐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것도 한국이 마감일(3월 31일)전에 가입해 창립회원국이 됨으로서 미중 간의 고래 싸움 1 라운드는 그럭저럭 잘 지나갔다. 이 틈에서 한반도 통일문제는 숨을 쉬지도 못했다. 이제는 통일이야기가 나오겠지 기대 했지만 경남기업의 성관종 전회장이 숲속에 들어가 목숨을 끊으면서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 먹은 사람들의 명단이 발견되는 통에 정치계가 발칵해 통일정국은 또 쪽도 못쓰고 뒷전으로 밀려나게 됐다. 통일정국은 이래저래 뒷전이다. 세월호 때문에 뒷전, 청와대 십상시(내시) 문꼬리 소란 때문에 뒷전, 장관 총리 청문회에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났었다. 이완구가 청문회에서 간신히 턱거리로 총리가 되었고, 말썽 많던 경상도 싸나이 “우리가 남이가”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에서 물러나더니 이명박정부의 푸실 한 자원(資源)투자 비리 때문에 통일은 또 뒷전이 되나 부다 걱정했다. 통일은 이레치고 저래치고 언제나 뒷전이다. 통일을 기다리는 우리는 통일 뒷전을 반대 대통령은 말했다. “통일은 기다려서는 안 되며 우리가 닥아 가야하는 통일이 돼야 한다“며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다.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고 젊은이들의 창창한 앞길을 여는 것이며 어느 개인이 할 수 없는 민족의 대사다. 수차 이 칼럼은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단번에 한국이 8천 만 인구가 되고, 단번에 영국 독일 프랑스와 대등해 지는 길은 오로지 통일뿐이고 한바 있다. 국력을 다 여기에 쏟아 부어야한다. 젊은이들의 장래가 절박한 이 시기에 한국 국민의 통일의식이 너무 약하다. 지금은 통일의 담론을 국시로 해야 할 때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이 통일을 진실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지난주(제 425호) 문경 난에서 세준이 아버지 주한 미 대사 리퍼트가 졸지에 김기종이한테 칼침을 맞고 치료 병상에서 읽은 ”두개의 한국 The Koreas“(1천 페이지)의 공동저자 로버트 칼린이 기자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남북을 아우르는 인재의 빈곤을 아쉬워 했다. 남북실세들 인천에서 사랑방 얘기 그는 또 미국은 지난 14년 동안 대북관계에서 시간만 낭비했다며 지난 2월 달에 시작한 키 리졸부 한미 합동군사 훈련을 시작하기 전 (1월10일)에 북한은 미국은 한미합동훈령을 중지하면 북도 미국이 원하는 핵 개발을 일시 정지하겠다는 제의에 대해 그 제안을 받아 들여 협상을 했으면 의외의 결과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유엔 북한 차석대사(안명훈)는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이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중단하면 올해 안에 한반도에서 많은 일들이 해결 될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무슨 음모가 있다(사전조치가 없는 제안)고 했고 한국정부는 도둑이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며 거절했다. 칼린은 또 오는 5월에 광주에서 있을 유니버사이드게임에 북한이 대규모 선수단을 보내는 데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대화가 열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지난주에 이 칼럼을 통해 밝혔던 대로 작년에 있었던 인천 아시안 게임 체육대회 폐막식에 북한 실세 3인방이 벼락치기로 김정은 전용비행기를 타고 내려와 인천 영빈관에서 점심시간에 남한 정치 실세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면담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혹시 이번에도?). 그 때 북에서 실세 3인 방이 인천에 내려오면서 그들은 공식 연락 채널인 통일부를 거치지 않고 인천에 내려와 있는 북한 선수단 단장에 직접 알려 왔고 선수 단장은 이를 체육회를 통해 청와대로 알렸다. 정부는 당황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그들을 만나 주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들이 만났던 한식집 영빈관도 별안간 남북한 실세들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음식준비에 밤을 새웠다. 하지만 많은 김치만은 별안간 준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웃집에 다니며 김치를 모리해 왔다고 한다. 높은 사람이든 얕은 사람이든 우리밥상에는 김치는 꼭 있어야 할 반찬이다. 해방 후 70년 사상(69년) 이렇게 남북 간의 고관 대작들이 한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처음 있는 큰 정치적 행사이고 역사에 기록 될만한 일이다. 이때 청와대 한 안보 실세가 박근혜대통령을 만나겠느냐며 만나겠다면 주선하겠다고 했지만 북한 김정은 다음 실세인 제 2인자 황병서는 이번엔 준비가 안 됐으니 다음 기회에 만나겠다고 양해를 구했고 박대통령은 이들을 만나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결과가 됐다. 남북 간의 최대의 정치 실세들이 격도 따지지 않고 의제도 없이 그야말로 동네 사랑방에서 동네 어른들이 만난 것과 같다. 통일을 기다리는 많은 국민들은 이를 계기로 무엇인가 됐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칼린은 인천에서 있었던 남북 실세들간의 번개 상봉을 보면서 ”핑퐁외교“도 생각했을 것이다. 죽의 장막을 무너트린 핑퐁외교란? 핑퐁외교는 중국의 죽(竹)의장막을 무너트리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핑퐁 선수들이 선수촌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돼 중국의 제2인자 주은래와 미국무장관 키신저가 극비리에 베이징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조율하게 됐고 이듬해에 닉슨 미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모택동주석과 회담을 했다. 그래서 이를 핑퐁외교라고 하게 됐고 외교가에서 자주 쓰는 말이 됐다. 소련의 철의장막이 무너지고 핑퐁외교로 중국의 죽(竹)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미국과 중국은 외교를 트게 됐고 우리나라도 덩달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북방외교를 하기에 수월해졌고 노태우 정부는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도 북방외교를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 남북관계도 많이 달라졌다. 정상획담은 없었지만 고위급 남북 당국자들이 가장 빈번하게 왕래하기에 이르렀다(박철언 회고). 그러면 핑퐁외교는 어떻게 시작 됐을까? 미국의 한 핑퐁 선수가 1971년 4월에 일본 나고야에서 있었던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석한데서 시작 됐다. 19세의 미국 핑퐁 대표선수 글렌 코원이 선수촌에 있으면서 연습을 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가는데 버스를 놓쳐 어떻게 훈련장으로 갈지를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중국 선수단을 태운 버스가 글렌 코원앞에 와서 섰다. 1961년, 1963년, 1965년 남자 단식을 제패한 세계 챔피언 선수인 좡쩌둥(莊則棟 1940-2013)이 버스에서 내려와 코원을 태우고 연습장으로 데려다 주었다. 선수겸 단장이었던 좡은 그 때 코원에게 황산(黃山)이 수놓인 항저우(抗州) 실크 셔츠를 선물했다. 이때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일어나 나라 안이 한참 소란했을 때다. 이런 때에 좡 단장이 적국에서 온 미국선수를 우호적으로 대해준 행동은 중국공산 정권으로서는 용서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다음날 코원은 좡 단장을 찾아가 평화를 상징하는 3색 셔츠를 고맙다는 답례로 선물했다. 이를 지켜본 중국 기자가 코원에게 물었다. ”중국을 방문하기를 원하냐“ 이에 대해 코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론“이라고 대답 했다. 중국 국영 신화사 기자는 이 두선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재 빨리 기사로 작성해 베이징 본사에 송고 했다. 본사에서는 일본에서 들어온 이 두 핑퐁 선수들에 대한 기사를 일반기사로 취급하지 않고 중난하이(中南海,중국의 최고권부)에 ”참고자료용“으로 직보(直報) 했다. 이 ”참고자료“는 국영 신화사 내부에서만 보는 비밀 고급정보에 속한다. 이 참고 지를 내참(內參, 내부에서만 보고 참고한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이 시스템이 중국에 있다고 한다. 지금에는 핑퐁선수가 서로 버스를 태워주고 선물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고 흔해빠진 일이지만 당시 중국에는 문화혁명 중에 있었고 서방국들과는 외교가 완전히 차단 된 공산주의 체제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선수가 적국인 미국선수와 교류를 했다는 것은 그것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니 중국 신문사로서는 특종깜이었고 내참에 직보할만했던 기사였을 것이다. 주석 모택동이 이 내참기사를 보고 ”좡선수가 탁구뿐 아니라 외교까지 잘하는 정치두뇌를 갖춘 인물“이라며 그 미국 선수를 초청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닉슨 미대통령과 모택동이 서로 만났고 외교를 트게 됐다. 왜 남과 북사이에는 70년 동안이나 여러 종목의 선수들이 남과 북을 왕래 했고 70년을 두고 당국자들도 빈번하게 왕래 했을 때가 있었다. 북한에 안갔다온 사람 말안통하는 촌사람 지금이야 5.24 제재로 왕래가 끊겼지만 한 때는 정가 뿐아니라 학계 예술계에서까지 북한에 다녀오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다고 까지 했던 시절이 있었다. 최고로 많을 때는 한 달에 1만 명이 좀 안 되는 사람들이 남북을 왕래를 했다. 작년에 인천 아세안 게임 폐막식 때에 박대통령과 김정은만 제외한 남북의 실세들이 한자리에 앉아 점심까지 하면서 사랑방 애기를 해서 무엇인가 이뤄지나 했지만 아무것도 된게 없다. 핑퐁외교만도 못한 실세들의 만남이 됐고 정부는 접심 값만 몇만 원만 지불한 허세가 됐다. 어렵께 어렵께 두 번 남북정상이 만났지만 두 번 다 잘했다 못했다. 굴욕외교였다, 격에 안 맞았다, 너무 많이 퍼주었다 등 말도 많았다. 지금 대선 한번 치르며 돈 주고 받으며 떼먹는 돈 액수가 얼마인가? 경남기업 성회장은 선거판에서 말(馬) 잘 골라 누가 한번 따져 봤으면 좋겠다. 물론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에게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경마장에서 돈 주고 말 사는 것과 다른게 없다. 선거가 때가 되면 돈을 누구에게 걸어야 하는지 앞으로 정치판에서 잘 뛸 말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점쟁이네 집에까지 간다. 선거운동 하는 선거꾼들도 누가 당선 될건지 점쟁이 집을 찾는다고 한다. 선거 때 오고가는 돈, 선거가 끝나면 불법선거 재판하는 돈, 말사는 돈 등은 얼마나 될까! 이번에 말썽이 난 경남기업 전 회장 왕관종도 선거판에서 잘뛰는 말을 골라 투자하다 마지막에 실패한 사람이다. 통일 통치자금과는 판이한 비교이긴 하지만 통일교육을 위해 나라 돈을 더 많이 써서 통일담론을 최소한 박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대박 론을 터트렸을 때만큼 국내에 항상 통일담론이 국민들 사이에 가득 차게해서 주위 강대국들이 한국국민들은 통일 아니면 죽을 것이라는 데까지 인식이 바뀌도록 통일교육에 투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에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이 칼럼은 www.cafe.daum.net/mkchicago 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민속 연구원 제 426호 charakwoo@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