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23 14:17
잊혀진 6.25 전쟁. 김일성과 이후락 빌담. 종북의씨 울지 않는애 젖 안 줘 이제는 6.25전쟁이 젊은이들에게 잊혀진 전쟁으로, 나이든 할아버지들의 재미없는 나쁜 기억과 과거 이야기로, 우리의 일이 아니고 시답지 않은 남의 일처럼 됐다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 김종석 대변인은 말했다. 6.25에 대해 초등학교 5.6학년 학생들이 가장많이하는 질문은 한국이 이겼느냐는 질문이라고 한다. 많은 학생들이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휴전이 언제 됐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한국교총이 2013년에 교원 277명에게 한 설문조사에서 70%의 교사들이 학교교과 과정에서 6.25전쟁에 대한 교육이 미흡했다고 대답했다. 한 학원 선생이 학원에 오는 고등학교 학생 9명에게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느냐고 물었는데 반에 가까운 4명이 언제 일어났는지 몰랐다고 한다(대학생은 12%). 또 남침인지 북침인지도 잘 이해를 못하고 단어의 혼동으로 9명중 8명(대학생은 32%)이 북침(남한이 북으로 쳐들어갔다는 뜻)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만큼 6.25 전쟁은 젊은이들에게 무관심하고 잊혀진 전쟁이 되고 말았다. 이제 통일은 한국국책의 최우선순위이며 통일은 우리가 무역 강국이 되고 문화강국이되고 지적강국이 된다는 웅지가 강건너 먼 나라 일처럼 멀어지고 있어 큰 염려가 된다. 북한을 연구하는 기관도 많고 연구소도 많고 교수도 많고 이들을 총괄하는 통일부도 있으며 대통령 선거 때만 되면 후보들은 통일하겠다고 외치지만 왜 6.25전쟁은 잊혀만 가고 통일의식은 식어만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세대에 사는 정치가 교육자 누구든 장래의 꿈인 학생들에게 역사교육을 통해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통일 교육만은 철저하게 시켜서 통일은 우리세대에서 마무리해야할 시대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식토록해야한다. 미국사람들도 중국 사람들도 일본사람들도 한국국민 자신이 얼마나 국익에 목숨을 걸고 통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반신반의하고 있다. 통일의식이 결여된 당사자인 한국인들에게 3자인 미국이 중국이 일본이 통일하라고 하지 않는 거다. 울지도 않는 애에게 왜 뭐하러 젖을 주나! 게다가 한국통일이 자기나라 국익에 별 도 움이 안 될 수도 있고 오히려 국익에 반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에 관계된 기구 기관들이 발 벗고 나서야하며 특히 정치가들이 분발해야 국민들이 따라 간다. 김일성과 이후락 밀담은 외세 배격 여기서 박정희와 김일성이 1972년에 합의했던 7.4 남북공동성명을 상고 해 보면 지금이나 그 때나 통일에 관한 한 남북관계에서 큰 변화가 없다. 7.4 공동성명이 나온 지 43년이 됐지만 통일엔 별 진전이 없으니 이 또한 답답한 일이다. 7.4공동성명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평양에서 북한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김일성의 동생)과 작업했다. 그때 김일성과 이후락이 대담한 것을 보면 사뭇 뜻하는 바가 있다. 이회담은 1972년 5월4일 새벽에 이루어졌으며 전쟁후 남북 간에 사상초유의 밀담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후락을 특사로 김일성에게 보내 극비회담을 하게 한 것에 대해 김일성은 이후락에게 “박대통령이 우리(김일성과 이후락)를 신임한다는 표시라며 이후락이 적진(북한)을 방문한 매우 대담한 영웅이라고 칭찬하는 말로 대화가 시작 됐다 (이날의 대담기록은 이후락의 수행원이 17년이 지난 후에 공개했다) 이후락-- 박대통령과 제 자신은 우리 스스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4대 강국(미 중 일 소)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며 우리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뜻입니다. 우리는 결코 미국과 일본의 압잡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문제를 우리들끼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성-- 우리는 어떤 고하니 외세에 의존하는 통일엔 반대합니다. 우선 이것이 박대통령과의 의견 일치입니다. 이후락--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외세의 간섭을 가장 싫어하는 분입니다. 김일성-- 그렀다면 문제는 어지간히 성숙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외세를 배격하고 싸움하지 말고 민족이 단결하고 그밖에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런 것은 다 덮어둡시다. 이후락-- 4천만에서 5천만의 인구를 가진 민족은 강대국입니다 (당시 남 인구 3천200만, 북은 1천400만). 1백 년 전에는 우리가 약했기 때문에 열강들에게 굽실거렸지만 (통일이 되면)앞으로는 열강들이 우리에게 굽실거릴 것입니다. 열강들이 통일을 희망하는 것은 우리에게 헛이야기지 속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김일성--열강이나 제국주의는 한 민족을 분할하기 좋아하고 여러 민족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김일성은 이어서 1968년 청와대 습격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김신조 사건). 자기는 몰랐다며 조직 내의 맹렬분자들이 꾸민 일로 그 일로 정찰국장 및 보위부 참모장을 파면 했다고 말했다. 7.4 공동 성명. 7.4는 미국이 독립 한 날(독립선언서) 그 후 박성철 북한 제2부총리가 답방형식으로 서울에 내려 와 박대통령과 밀담을 하고 7월4일 공동성명을 발표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날은(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그래서 ”두 개의 한국“의 저자 돈 오버도퍼는 미국과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뜻으로 박대통령과 김일성이 7월4일을 택한 것 같다고 했다. 성명을 발표하기전에 박대통령은 이를 미국대사관에 전달해 살펴볼 수 있게 조처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이후락의 대화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바로 남북한 당사자들이 강대국에 대한 공동 경계심을 서로 확인하고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이루자고 강조한 밀담이 오갔다는 점이다. 7.4 공동성명은 남한이 다음과 같은 3가지 원칙에 완전히 합의를 보았다고 천명했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해야한다(자주).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한다(평화).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대단결을 도모해야한다(단결). 남북이 합의는 했지만 공동성명에서는 양측이 상대방을 공식적으로 (상대가 나라임을) 승인했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부의 이름으로 서명하지 않고 정보부장 이후락과 조직지도부 부장 김영주가 서명했다고 한다 (이상은 두 개의 한국; THE TWO KOREAS 돈 오버도퍼 저서 참조). 7.4공동성명 3개월 후 10월. 종북의 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성명이 나온지 3개월만에 남한에서는 유신 헌법이 선포 되었고 김일성은 공산주의 북한 헌법을 개정하면서 김일성대학 철학과 황장엽이 창안한 주체사상을 도입해 구소련의 막스-레닌주의와 공산주의를 배척했으며 북한은 주체사상의 나라가 됐고 김일성은 독불장군이 됐다. 이 주체사상은 훗날 남한 대학가에서 김영환이 강철서신을 쓰게하는 종북의 기초가 되었고 온 남한 대학가에서는 반정부 데모가 끝일 날이 없었으며 오늘날의 종북의 씨가 됐다. 그리고 1979년에 박정희는 비운으로 죽었고 김일성도 1994년 7월에 김영삼과 남북정상회담(7월 25일-27일)을 하고 27일에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기로 돼 있었지만 7월9일에 사망해 남북 공동선언은 불발 됐다. 만일 김일성이 살아 정상회담을하고 7.27 공동 성명이 나왔다면 이 성명에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22 년 전에 있었던 7.4 공동 성명보다 진일보 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죽기 바로 직전에 그는 “통일선언문”을 준비했고 그 안에는 통일요강이 들어 있었다는 전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차관이었던 동훈(81)이 작성한 초안이 공개 됐다. 그 요지는 첫째. 무력행사나 폭력적방식에의한 통일기도는 영구히 피해야한다. 둘째. 반목과 대결이 아닌 평화통일을 이뤄야한다. 셋째. 한반도 통일을 위한 동북아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넷째. 남북 모두 진정한 대화의 장으로 나오는 것이 통일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등의 내용이다. 박정희 북에 대한 자신 만만 박정희 대통령은 70년대 경제성장을 다진 후 북한 체제와 경쟁할 만 하다는 자신감이 붙었고 다음 목표는 통일의 기초를 놓는 것이며 대화를 통한 통일이었다고 한다. 선언문은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지---로 시작했다. 근세 100년 동안 비운의 시대를 닫지 못한 채(중략) 우리는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침략전쟁에 가담한 적도 없고 또 패전국도 아닌 우리가 이토록 긴 세월을 분단 상태로 있는 것을 체념하며 숙명으로 여기고 여건의 변화를 바라고 있을 수는 없다. 격변이 예상되는 80년대의 관문을 넘어서며 우리는 민족의 현재와 장래문제를 매우 심각히 고려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결의를 굳게 한다. 첫째원칙 ”평화통일“부분에서는 통일국가로 가는 과정도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나가야한다. 전쟁이 다시 온다면 또 100년이 처참해진다. (중략)비평화적인 무력이나 폭력적혁명적 방식에 의한 통일은 민족의 이름으로 용납할 수 없다.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둘째 원칙 ”자주통일“부분에서는 강대국이 아니라 남북이 주도하는 통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문에 수차례 강조했다. "믿기어려운 나라들과 그리고 불투명한 전략을 뒤에 숨긴 세력들 사이의 타산 앞에 우리 장래운명을 내 맡길 수 없다". (중략) 7.4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화해와 대단결부터 모색해야한다. (중략) 민족자결의 원칙과 국제관계의 엄중한 현실인식에서 안으로부터 주체적 노력과 병행하여 관계국사이에 통일을 위한 외적조건 환경의 연결 조정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 부분은 당시 주한미군 철수문제로 미국대통령 짐미 카터와 엇박자를 낼 때이므로 박대통령은 미국대통령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에 “남북 통일은(주변국에) 해롭지 않다”는 메시지를 발신하기 위해 일부러 강조했던 부분이라고 전 동차관은 말했다. 사실 일본에만 강경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에도 가끔은 우리 국익에 반할 때는 박정희대통령같은 용기를 갖고 있어야한다. 셋째는 “민주통일”부분이다. 어느 일방의 편견이나 강단을 무조건 실현하려 들것이 아니라 모든 사업은 민족이라는 기준에 충실해야하며 궁극적으로는 통일은 민족 성원(成員) 전체가 각기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지어져야한다. 넷째는 “남북대화”부분이다. 남과북 어느 쪽도 진실로 통일을 원한다면 대화의 마당에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화만이 통일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중략) 불충직한 통일 대화는 역씨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대화의 진행을 어떤 불은한 전략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중략). 이선언문의 내용은 김대중대통령의 통일 3원칙인 “무력사용 불용, 흡수통일 불용, 교류협력을 통한 남북관계발전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한다. 박전대통령의 선언문은”(중략) "분단 민족으로서 겪어온 비운의 시대를 끝맺고 훗날 역사에 1980년대를 살아온 세대가 가장 어리석은 세대로 되지 말 도록하여 새 민족사를 창조해 나갈 위대한 시대의 막을 함께열 수 있게 할 것이다. (중략) 통일과업에 일대 진전을 이루고자 여기에 통일요강을 정중하게 제시하고자 한다“로 끝을 맺었다. 지금 봐도 울림이 있다. 이 선언문에 대해 동국 대 김용헌 북한학교수는 시공을 뛰어넘어 현재에도 울림이 있다며 당시 북한은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상황이어서 김일성주석이 정치적 목적으로라도 이 선언에 화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박정희(1917년)보다 5살이 많다. 김일성의 어머니는 독실한 장로의 딸이며 아버지는 기독교학교 출신으로 한약방을 했다. 김일성이 정식하교를 다닌 건 평양에 있을 때 6년과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2년은 만주에서 중국인 학교에 다닌 것이 전부다. 박정희는 정식사범하교를 거쳐 교사도 2년 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사관학교에 유학도 했다. 박대통령이 18년 임기 중에 추진한 경제개발은 눈부셨다. GDP는 매 10 년마다 3배씩이나 증가했고 선진국의 예로는 100년이 소요돼야 가능한 성장을 그의 임기 중에 이루었다.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남북관계는 어떻게 됐을까! (이 칼럼은 www.cafe,daum,net/mkchicago 문경회원 난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한국민속 연구원 제435호 charakwoo@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