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01 15:48
박정희와 세종대왕 1 등 타이. 홀 애비 타령. 벼룩이 부처 손바닥 한국 역사상 나라의 물줄기를 돌려 논 중대사를 결정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10년 100년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국운이 걸린 결정을 해야 할 기로(岐路)에 있을 때가 많았다. 이 중대사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역사학교수, 역사소설작가, 역사연구원, 재야 역사학자 101명이 모여서 “한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들” 108가지를 선정했다. 그리고 사건들의 중요도(重要 度)의 순서를 정했는데 1 위에서 20 위까지는 이견이 없었지만 21 위부터는 이견이 분분했다. 108가지 중대사중에 제일 많이 등장한 사람은 세종과 박정희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했고 대마도를 정벌했고 6 진을 개척했으며 갑인자(甲寅字)주조 인 쇠술을 개발했고 장가들면 신랑이 처가에서 살아야하는 제도를 바꿔서 신부를 신랑 집으로 데려 오도록 했고(숙 신 옹주 친 영) 공법개혁을 하는 등 6개의 중대한 결정을 했다. 박정희는 516 혁명, 고속도로를 처음으로 건설했고 경부고속 2 년만에 개통, 월남 파병, 한일 회담, 한글 전용, 10월 유신 등 6가지로 세종과 일등 타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역사적인 중대 국사를 현명하게 많이 결정했다는 것과 백성을 먼저 걱정한 것과 재위기간이 길다는 것과 好 Girl(호걸) 이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재위 31년 6개월 동안 한 일도 많았지만 기록에 있는 부인만 6명이고 자식이 22명이나 되었다. 박정희는 왕조 시대 임금도 아닌데 헌법을 바꾸면서 18년 동안 장기 집권 중에 사망한 그는 상처한 후 술자리가 자자졌고 결국은 술자리에서 부하의 총탄에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동란 중 서울에서도 어느 미녀 대학생과 동거했고 첫째 정실은 중이 됐다. 재임 중 영부인은 8.15 광복 행사장에서 저격당해 유명을 달리 했다. 육사 사관학생들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충성하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훈련받고 육사를 나온 장교들이 정보부장 김 재규 부하로 있으면서 “죽어도 하기 싫었던 일” 채홍사 노릇하다 김 재규와 같이 사형 당한 것을 보면 박 통도 세종만큼이나 호걸이었던 같다. 하루는 국사를 마치고 박정희와 정일권(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2년 선배) 두 홀아비가 형님 동생하며 홀아비 타령을 하면서 술을 마셨다. 박 통이 “형님 장가 드셔야지요” 했다. 이 두홀애비는 사석에서는 형 동생 했다. 정일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모 대학의 음악 선생과 연애하고 있는데 장인 짜리가 반대해서 성사가 안 된다”고 홀애비 고민을 털어 놨다. 박 통은 농담으로 한 말인데 정일권은 연애한다는 진담을 꺼냈다. 박통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기가 나서서 중매 해 보겠다고 했다. 장인 될 사람은 일류 대학 나온 엔지니어고 잘 사는 집안이라고 했다. 박 통이 그 장인 깜에게 “따님을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출가시켜 달라고” 일필휘지 장문의 간곡한 편지를 썼다고 한다. 장인은 박통의 친필에 감탄했는지 혼인을 허락했고 정일권은 이렇게 해서 음악교수의 저고리 고름을 푸르고 신방을 꾸몄다. 정일권도 희대의 好 Girl(호걸) 이었다는 소문이 전시중에 그를 모시던 장교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고 한다. 전쟁 통에도 부하들이 빈 드럼통에 색 씨를 숨겨 일선까지 운반해 진상했다고도 한다. 다음 중대 결정을 한 사람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이방원)과 임진 난 때 피난 다니느라 고생한 선조이고 일본과 한국해역에 평화선을 선포한 이승만이다. 태종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처남까지 죽이는 등 무수한 정적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고 왕세자인 바람둥이 장자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셋 째 세종을 택해 보위를 승계 했으며 (세종이 성군 재목임을 미리 본 것) 이조 실록을 편찬토록 한 것이다. 선조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국고로 편찬토록 명해서 동양에 수수 백 종이나 되던 한의서 춘추전국시대를 허준의 동의보감 한 권으로 천하 통일하게 했고 감옥에 있는 이 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임명해서 임진왜란을 우리의 승리로 이끌게 했으며 세 환사(일본에 포로를 귀환하기 위해 사신) 파견 한 것, 여진족과의 외교 단절 한 것 등이다. 이승만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한 것과 한미동맹 체결이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한 것과 한양천도 한 것 정도전을 만나 조선을 공맹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것 등이다. 왕건의 삼국 통일, 고려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해 오늘의 고시제도가 된 것, 광해군의 후금에 대한 실리 외교,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경복궁 중건 등은 역사적인 중대한 결정이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중대 결정들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고유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전통 문화의 뿌리가 되어 내려오고 있다. 우리들은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그 대로 살라가는 가는 것이 옳은 것으로 믿고 있다.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잘못한다고 저항을 받는다. 여당에 대항하기 위해 야당의원들은 잠근 국회 회의실의 문을 쇠망치와 전기 톱으로 부수고 들어가서 요 이불 깔고 먹고 자며 농성한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긴 하지만 철없는 애들 같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대립하며 싸우는 것 보다는 협상을 해서 제3 의 평화 세계를 창조한다는 문화가 우리에게는 부족하다. 회의하다 싸움하는 것은 국회뿐이 아니다. 미국 LA 뉴욕 시카고 등 교회에서도 한인회에서도 각단체마다 한국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흔히 보는 일이다. 어 떤 세대 어떤 나라도 대세는 권력자가 원하는 방향에서 결정이 나게 되고 나라는 그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국회가 그렇게 난장판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만든 법이 좋으나 나쁘나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 되고 백성들은 그 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백성은 벼룩이 뛰어 봤자 부처 손안에 있다. 그래서 백성은 임금을 잘 만나야 하고 많은 단체들도 우두머리를 잘 만나야 한다. 그래서 그 단체으이 우두머리를 보면 그 단체가 어떤 단체인가를 알게 된다. 그래서 나라든 단체든 장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지도자 잘못 만나 고생하는 사람들은 북한 주민이 세계에서 그 으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