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민주투사 태극기 내리고 인공기를 계양했으니 항복 아닌가?
김일성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 記憶 하며
김영삼 만나겠다.
미국은 대북 전쟁 준비했다
전 미국대통령 카터는 기독교신자이며 장년주일학교 선생이었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후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수리해주는 모법 시민으로
시카고 교외의 에반스톤 시(市)까지 와서 집을 수리한 일도 있다.
그러나 카터를 최측근에서 경호했던 사람들이 쓴 글에 의하면
주일학교 선생과는 걸맞지가 않게
허구와 가식과 가장(假裝)을 제일 많이 했던
대통령이었다고 회고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은행 이자가
한 때 22% 까지 뛰어올라(현재는 5% 이하) 모든 경제가 파탄 났었다.
한국과의 관계도
미군 전면 철수 론을 들고 나와
미군철수에 대비해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 대책으로
핵개발을 시작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을 미국의 핵우산아래 있으라며 핵개발을 중지시켰다.
그래서 그랬는지 김일성은 카터를 91년, 92년 93년 매년 초청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한반도 문제가 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도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는 등
한반도 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991년부터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대북 제재 문제와 미군을 증강하는 등
대북전쟁을 불사하는 등 전쟁 준비에 들어 갔고
전쟁 위기가 최고로 고조 됐다.
카터는 대북 긴장과 핵을 해결하기 위해
평양에 가겠다는 서한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크린턴에게 보냈다.
백안관은 논의 끝에
카터가 미국정부의 대표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방북을 허용했다.
카터는 김일성을 만나러
94년 6월15일 부인 로살린을 대동하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했다.
다음날 김일성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카터와 악수를 했다.
카터는 김일성에게 핵문제가 해결될 경우
양국관계정상화를 위한 고위급 협상이 진전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문제점은 두 나라 간에 신뢰가 부족함으로
신뢰를 쌓는 것이 주된 과제라며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러 번 밝혔지만 자신의 말을(미국이) 믿어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김일성은 핵문제 해결방안으로
(미국이)북한에 대해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요구하며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원자력에너지라는 것을 강조했다.
김일성은 동부인 해 카터 내외와 대동강 구경
김일성은 공식석상에 대동한 적이 없는 부인 김성애와 동부인해
로사린(카터 부인) 여사 일행과 서해 갑문을 참관하고
요트에 승선 해 대동강을 구경했다.
이 자리에서 카터는 미국국민들에게 화해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를
북미합동으로 발굴하는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한 즉답을 피했지만
이 때 동석해 있든 김성애가 카터의 제안을 좋은 일이라고 거들자
그때서야 김일성은 “알았소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합시다”라고 승낙했다고 한다.
요트의 선실에 놓인 작은 탁자에 김일성과 마주 앉은 카터는
김영삼대통령이 부탁한 남북정상상회담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카터에게 그 동안 남북 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남북간 합의를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성과가 없었다며 유감을 표했다.
그는 이어 남북관계에 진전이 없었던 것은
“남과 북 양쪽 모두의 탓”이라며 “그 잘못의 책임은
양측이 공동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했다. 매우 주목해볼 만 한 대목이다.
김일성은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사를 기억한다며 만나겠다.
김일성은 이어 카터에게
김영삼이 93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영삼과 만날 준비가 돼 있으며
두 사람의 만남은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거추장스러운 준비회담 없이 개최돼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일을 비롯해 북한의 지도층들이
김일성과 김영삼이 만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거나 반대했다는 주장이 제기 됐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주위의 반대에 상관없이 남북정상회담에 열의를 보였다.
카터는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내려와 김영삼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한반도의 운명이 달린 일에
자신을 제외시키고 미국(카터)이
북한과 직접 흥정을하고 왔다는 생각에 카터에게 냉정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카터가 김일성과 있었던 정상회담 제의를 말하자
금방 김영삼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1시간도 안 돼 김대통령은
조건 없는 정상회담을 조속히 실시 할 것을 수락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김영삼은 역대 대통령들이 시도 했지만 실패한 정상회담을
자신이 주도해 이루어진 것처럼(자기공로로) 상황을 탈바꿈 시켰다.
1991년부터 수년간 내려온 한반도의 엄청난 긴장과 위기가
정상회담을 한다는 두지도자의 역사적인 화해가 커다란 희망으로 급변한 것이다.
카터와 김일성과의 평양 회담으로
미국의 대북제재 활동과 대규모 미군증강안은 보류됐고
미국이 제시한 핵개발 동결 안을 수락한다는
북한 측의 서면 확인을 받은 미국은
7월 8일 제네바에서 제3차 북미협상을 추진할 준비가 됐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최강국 미국과 가장실패한 나라 북한
구소련의 붕괴로 93년 초 북한은 동맹국인 구소련을 잃었고
중국과의 관계마저 격화된 시점에서
북 미간의 이 합의는
세계강국인 미국이 대북제재 활동을 시작하고
미군 증강 안이 논의되고 있는 찰라 에
김일성이 (카터를 통해)미국을 협상테이불에 앉게 했다는 것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실패한 나라에 양보하도록 한 것이며
북한이 위기를 면한 것이다.
북한에게는 날로 증강하는 미 군사력은
긴장의 고조일 뿐아니라 마냥 큰 위협이었다.
카터가 이 긴장을 협상으로 완화하겠다고
평양에 도착했을 때 김일성은 (미북간의)위기를 종식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카터가 김일성의 그 길을 제시한 것이다.
카터의 협력을 통해
미국이 구상한 핵 동결 안을 북한이 수락하고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동의한 김일성은
폭발직전의 (북미)대치국면을 진정시킨 것은 물론이고 향후의 협상공간도 열어 놨다.
김일성은 카터와 회담 한 후 김영삼과의 정상회담 준비에 골몰했다.
카터의 중재로 합의된 남북정상회담 일정은
(94년)7월25일 평양에서 시작하기로 돼 있었다.
남 북 양측은 남한 대통령이 1백 명 규모의 대표단과
80명의 tv 취재단이 평양으로 가기로 합의했다.
김영삼은 김일성이 주장하는 1국 2체제인 “연방제 통일안” 대신
이산가족 교환 방문, 서신 교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공유 등
점진적 조치를 통해 화해를 적극 추진하자고 제의할 방침을 세웠다.
김영삼은 당시 한반도에 대한 최근의 위기사태 때 보여준 김일성의 적극성을 보고
김영삼의 이런 제의에 김일성이 적극 합의해 줄 것으로 기대를 했다.
또 연속적인 정상회담도 할 것을 제안하기로하고
이를 위해 통 크게 북한 주민들에게 쌀 50만 톤을 지원하겠다는 준비도 했다.
북한은 남한기업인을 통해 공식적으로
10만 톤에서 20만 톤을 요청했지만 이에 두 배가 넘는 엄청난 물량의 쌀을 주려고 했다.
김일성은 평양에서 160km(400리, 266마일) 떨어진 묘향산 속림속
경관이 빼어난 별장에서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장소를 정하고
7월 7일 묘향산으로 들어가 손님(김영삼)을 맞기 위한 준비가 돼 있는지
침실과 욕실, 심지어 냉장고에 광천수가 넣어져 있는지 등을 직접 확인했다.
38 도의 폭염 속에 손님맞이 준비 중에 사망한 김일성
그날은 수은주가 38도를 기록하며 유난히 더위가 기승했다.
김일성은 저녁 식사를 하고 피로감을 느끼며
잠시 후 심장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의사들이 달려왔지만 극심한 폭우로 인해 김일성을 병원으로 후송할
헬리콥터 운행이 불가능했고 도로 역시 진흙탕으로 엉망이 된 탓에 육상 수송도 지체 됐다.
북한 관리들은 재미 교포언론인 쥴리 문 기자에게
의사들이 김일성의 흉부를 절개해 소생시키려 해 보았지만
시간상으로 너무 늦어 수포가 됐다고 전했다.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 사망이 확인 됐다
(이상은 돈 오버도퍼의 두 개의 한국; The Two Koreas 참조).
서울에 알려진 것은 7월 9일이었다.
만일 김일성이 죽지 않았다면 분단사상 최초의 1차 남북정상회담은
김영삼과 김일성이 1994년 7월 25-27 이루어 졌을 것이며
제 1차 공동성명은 7월 27일 나왔을 것이다.
이 불발된 7.27 김.김 정상회담을 준비한 실무자는
김영삼 대통령 당시 통일비서관이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다.
김영삼이 김일성과 나눌 대화의 내용 합의해야할 사안 관련 자료들을 준비했다.
1972년 7.4 공동성명에 관계했던 이 후락은 사망했고
1차 2차 정상회담 정상들도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실무자 이었던
7.27의 정세군, 6.15의 박지원, 임동원, 10.4의 문재인 이재정 등은 아직도 살아 있다.
이들은 정상회담의 산 증인들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5년마다 바뀌고 새로 나오는 대통령들은
제각기 다른 대북관을 들고 나와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통일관에 혼돈을 일으킨다.
그래서 통일관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대답을 재대로 하는 사람이 없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새 대통령이 내 놓는 대북관을 살펴보면
전 대통령들이 내 놨던 것과 또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미 나와 있는 내용과 차이가 별로 없다.
앞으로 새 대통령이 누가 되던 정상회담을 하게 될 때는
7.4공동성명과 남북 기본합의서,1차 2차 정상회담에서 나온
공동성명을 참고하게 될 것이고 그 바탕과 테두리 안에
당면한 문제를 가미한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전 대통령들의 대북정책을 무자를듯 짤라 없애지 말고
참작하면서 일관된 통일관을 만들어 계승해나가면
국민들이 통일관과 통일담론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태극기 내리고 인공기 달고 청진항에 입항
김영삼과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하기로 예정되었던
1994년 한여름도 지나고 1995년 여름에 “인공기 사건”이 동해안 청진항에서 발생했다.
1995년 6월17일 베이징에서 남북 당국자 간에 대북 쌀 지원 회담이 열렸고
여기서 정부는 6월말에 쌀 2천 톤을 북한에 보내기로 했다.
이것이 분단 후 최초로 우리 쌀이 북한으로 지원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6월 25일 동해상에서 요란한 출 항식을 했다.
김영삼 정부가 쌀 수송을 이렇게
서두른 이유는 이틀 후 광역 지방선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씨아펙스호)가 태극기를 꽂고 쌀을 실코 청진항에 입항할 때
쌀이 들어온다고 북이 환영할 줄 알았는데 반대로 문제가 발생했다.
북한 관리가 나와 입항을 저지하며
배에 계양돼 있는 태극기를 내리고 대신
인공기를 달고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결국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만 올린 채 입항해 하역작업을 했다.
이 사실이 국민들네게 알려지자
김영삼의 성급한 쌀 지원을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졌고
광역단체장 지방선거도 참패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올렸다는 사실이다.
국기를 내리는 것은 항복과 굴복을 뜻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민주화투사라고 자부한 김영삼이 아니었던가?
태극기를 내린 것만도 무참한데
거기에 인공기를 올리고 입항해 쌀을 하역했다.
그렇게라도 하면 선거에 이길 줄 알았지만 선거에서마저 졌다.
그 후 정부는 북한의 사과 없으면 쌀을 지원하지 않겠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북측의 쌀 회담 단장인 전금철이 직접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함으로 일단락 됐다.
(이 칼럼은 www.seoul.com 문경회원난에서 볼수 있습니다)
<한국 민속 연구원 제437호 charak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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