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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교과서. 김일성 3부자 실록과 조선왕조실록.

권율장군과 사위 오성 이항복의 해학. 

배꼽 아래 열린 구멍 뚫은 죄


임진 왜란과 3대 대첩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바다에서 

퇴각하는 왜선 300척의 퇴로를 막고 200척을 침몰시켜 대승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병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1598.11.8.). 


육전에서도 권율 장군이 말을 씩겼다는 

수원 세마대(洗馬臺)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이어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했다. 

한국계 명나라 장수 이여송(조상 할아버지가 한국사람)은 

5만의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에 3개월간이나 주둔해 있던 일본장군 소서행장을 탈환했다. 

이여송은 직속부대 2만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진격해오는 길목에서 

일본 패잔병들에게 허를 찔려 적이 쏜 화살에 

이여송의 말이 죽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기자 평양으로 후퇴했다.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서 한강을 배수진으로 하고 

목책(木柵)을 높이 세우는 등 싸울 준비를 하며 

변이중이 만든 포차(砲車) 300 대를 배치해 놓고 군사를 조련했다. 

서울에 주둔한 10만의 일본군이 이 소식을 듣고 

좌우 두 진으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4번이나 공격해 왔지만 

일진일퇴하며 모두 물리쳤다. 

권율은 “우리가 행주싸움에서 지면 명나라 이여송은 싸우지 않고 돌아 갈 것이다. 

그러면 조선은 왜적에게 짓밟힐 것이다. 

여기서 왜적을 섬멸해 꼭 승리해야 한다”며 병사들을 독전했다. 

행주산성의 아낙네들도 죽기를 각오하고 

한강 물을 길어다 목책을 적셔 적병이 불 지르는 것을 미리 막았고,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다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병에게 던져 죽게 했다. 

그래서 행주산성이란 이름이 새로 생겼다고 한다. 


권율은 불과 4천명의 군사로 10만의 적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승리는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김시민의 진주 대첩과 나란히 임진왜란을 

우리의 승리로 이끈 3대 대첩의 하나다. 


권율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바로 옆집에 장난 끼 많은 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의 집에 큰 감나무 가지가 권율 대감의 집 담 위로 뻗어 나 있었다.

담넘어온 가지에 주렁주렁 단감이 익으면 권율 대감집 종들은 

자기대감 세도를 믿고 마구 따먹었다. 

화가 난 감나무집 소년은 권율 대감이 마침 사랑에서 낮잠에 들어 있을 때 

장지문 구멍으로 주먹을 퍽 디려밀며“ 

대감님 이 주먹이 대감님 주먹입니까 제 주먹입니까? 하고 물었다. 

잠결에 대감은 별 이상한 놈이 다 있다며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건 알 것 없습니다“며 대답이나 빨리 하라고 다그쳤다. 

대감은 “이놈아 그것은 네 주먹이지 어째서 내주먹이냐”고 했다. 

“그러면 우리 집 감나무에 달린 감은 우리 집 감이 맞지요” 하고 다짐을 했다. 

권율 대감은 이 옆집의 소년을 기특히 여겨 

무남독녀 외딸을 청년에게 시집보내고 장인이 됐다. 

이가 바로 오성 이항복이고 한음 이덕형의 친구다. 

이들은 많은 해학(諧謔)적인 일화를 남겼다. 


오성 이항복의 해학 배꼽밑 뚫린 구멍 

옛날에는 대궐에서 일하다 방출된 궁녀가 남자를 만나면 

두 남녀를 간통죄로 다스렸다.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인 이항복의 종이 출궁한 궁녀와 

눈이 맞아 간통 좌로 감옥에 갔다. 

임금은 이항복을 빨리 입궐하라고 했다. 

이항복은 종의 간통죄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일부러 늦게 입궐했다. 

이항복은 임금에게 입궐하는 길에서 얘기꾼의 얘기를 듣다 늦었다면서 

모기와 빈대얘기를 했다. 

빈대는 피를 빨아먹기만 하고 항문(肛門)이 없어 배설을 못하는데 

마침 피를 많이 빨아먹은 빈대가 

“내배 터지면 나는 죽는다”면서 모기더러 

“네가 갖고 있는 침으로 내 배를 찔러 구멍을 뚫어 달라”고 애원 했는데 

모기는 “너 큰 일 날 소리하는구나 

도승지 이항복의 종이 본래부터(궁녀)의 배꼽 아래 뚫려 있던 구멍을 

다시 뚫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갔는데 

본시 없던 네 배에 생구멍을 내면 내 죄는 훨씬 더 무거울 텐데 

내가 어떻게 네 배에 구멍을 뚫겠느냐” 

“나를 죽일 소리 일랑 아예 하지도 말라”며 

모기는 활짝 날라 가 버렸다는 얘기였다.

“전하 이 얘기가 하도 재미가 있어서 그 얘기를 듣다가 지체되었습니다. 

통촉해 주옵소서” 아뢰였다. 

임금은 박장대소하면서 

경의 얘기는 동방삭(東方朔)의 해학과 같다며 종의 죄를 면해 주었다. 

야담(野談)은 임금도 좋아한다. 


세계문화 기록 유산에 등재돤 천년사직  

임금이 신하들과 한 대화를 기록한 것이 

승정원일기(지금의 대통령비서실 일기)다. 

조선왕조실록은 888 책, 1893권이나 되는 방대한 조선왕조에 대한 기록이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산 13개중 하나로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실록은 승정원일기를 요약한 것이다. 

우리 한국은 고려 왕씨 34왕 474년, 

이씨조선 27왕 518년 천년사직의 유구한 기록을 갖고 있다. 

어느 나라에도 천년 동안 임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임금이 죽고 그의 중진 신하들도 다 죽은 후에야 

그 임금의 업적을 기록해서 역사에 남겼다. 

당시 권력자들이 살아 있으면 이들의 영향으로 

승자의 기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공정한 역사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아야 공정하다는 전통을 지킨 것이다. 


이씨조선 3대 태종(이성계의 3남 이방원)은 

이성계가 죽자 “실록은 바로 써야 생생한 역사 기록이 된다”는 구실을 붙여 

하륜에게 태조 실록을 편찬토록 명했다. 

그래서 태조 실록은 생생한 기록이라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신하들이 개국공신으로 나라에서 록을 받으며 권좌에 있을 때 

편찬했기 때문에 승자에게 편향된 기록이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관들은 고려에서 이씨조선으로 역성혁명의 

주동자 태종 이방원이 살아 있는데도 

태조 이성계 실록을 편찬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함흥차사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라는 공민왕의 명을 어기고 

위화도회군 할 때부터 태조가 등극할 때 까지 이방원은 

쿠데타의 주동자로 정몽주 등 무수한 정적을 사살했다. 

그 후에도 왕자의 난을 두 번씩이나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자기 아버지 이성계의 친구 등 누구든 

왕도(王道)에 거슬리는 사람은 다 죽였다. 그

래서 이성계는 

임금이 된 자식 이방원(태종)을 보지 않겠다고 함흥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태종은 후에 잘못을 뉘우치며 태조 이성계가 신임하던 신하를 선택해서 

태상왕(이성계)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임무를 주어 함흥으로 보냈지만 

이성계는 오는 사람마다 죽였다(함흥차사). 

이런 태종 이방원이 자기 아버지 태조 실록을 편찬하겠다고 

서두른 이유는 자기가 실록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록은 사관들이 쓰고 사관들만 열람할 수 있다는 국법 때문에 

절대 권력자 임금도 실록을 열람하거나 고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 10대 연산군이 

생모 윤씨가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나 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실록을 보고 분노하여 

사상 최대의 사화를 두 번이나 일으켜서 

몇 백 명의 신하들을 파리 목숨처럼 죽였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임금 자리에서 떨려 났다. 


19 대 임금 숙종(재위 45년)실록은 9년에 걸쳐 편집되었는데 

9년 동안에 임금이 경종에서 영조로 바뀌고 당쟁으로 

정권의 실세들이 업취락 뒤취락 몇 번씩 바뀌면서 

실록 편찬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편찬시작 할 때는 노론의 정권이어서 

노론의 사관들이 편찬을 했기 때문에 노론이 승자로 기록 됐고, 

이듬해에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소론의 사관들이 편찬을 맏게 되어 또 그들이 승자로 역사가록이 됐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임금이 되자 

소론이 축출되고 다시 노론 측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노론이 승자로 편찬 작업을 끝내고 인쇠를 끝내자 또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소론은 승자로서 

자기들의 입장을 살리기 위해 뺄 것과 보충 할 것이 발견 됐다. 

그러나 편찬이 끝난 실록은 고칠 수 없다는 전통에 따라 

그대로 두기로하고 대신 궁여지책으로 

자기들에게 분리한 부분을 수정보충 한 “보궐정오”란 부책을 만들어 

덧붙이는 것으로 숙종실록을 마무리했다. 


노무현과 북 김가네 3부자 실록 

한국 역대통령들에 대한 현대판 청와대 실록

(노무현 일지만 해도 3백 76만 건)이 

성남시 기록 관 (2007년 11월 개관)에 영구 보존되어 있다. 

필경 북한에도 김일성 부자의 실록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해방 후 두 토막이 나 6.25 전쟁을 겪으며 

70년 동안 이념전쟁으로 혼란을 겪어 오면서 

북의 김가네 3부자 독재기록은 알길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 한반도의 현대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어려서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는 어른이 되어서도 사실로 믿고 있다. 

지금은 학생운동이 많이 변질되어 있지만 처음(4.19) 학생들이 

정치에 뛰어 들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학교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정치인들이 정치를 하지 않고 제 맘대로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정치하는 어른들을 불신한 데서 시작 됐다. 

정치가 교과서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과서는 기본 원칙을 학생에게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하지 않는 부패한 정치인들을 배척한 것이 4.19 학생 혁명이다. 

교과서는 나라의 백년대계를 다짐하게 하는 사회적 성경(聖經)이고 

그래야만 나라가 바로서게된다. 

역사 교과서 때문에 국론이 분분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분단된 채로 이념 싸움으로 

70년을 지내온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역사교과서가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바뀌는 것은 위험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좌우 이념 전쟁이 시작 됐고 

이어 6.25 동란이 발발 됐다. 

정전이 돈후 지금까지 남북이 가로막혀 문서열람이 원활하지 않고 

소련이나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했지만 

이에 대한 극비문서도 일부분만이 공개 됐기 때문에 

불확실한 사실(事實, 史實)들이 너무 많다. 


더구나 북의 김가네 집 3대 왕 조의 독제체제에 대한 역사를 

아는 사람이 없고 공개된 문서가 없고 

따라서 북의 정치사의 내용 또한 그러하다. 

북한은 미국에서 일어난 9.11 사태도 

미국이 알카에다를 압박하기 위한 자작극이고, 

천안함 사건도 한 미가 북한을 말살하기 위한 합작극이고 

지난 4월에 있었던 휴전선 목함지뢰도 누가 가설했는지 

불분명하다는 주장을 하는 등 

북한 정권은 불가사의한 면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근 현대사를 논의한다는 것은 좌편향 적으로 

기술할 위험이 크고 사실에서 먼 가정추측(假定推測)역사가 될 수도 있다. 


검정교과서와 국정교과서 

지금 고등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검정 역사교과서는 

좌편향적인 근대 역사 교과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검인정해서 나온 검정교과서(좌편향적)를 

현재 53%의 고등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내용은 “좌편향”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전가, 8.15 광복과 정부수림의 부정, 

대한민국을 민족정신의 토대 부족을 암시하는 것 등 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 정부가 이를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로 바꾸겠다고 나섰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선진국에는 국정과서가 없는데 

왜 우리 정부에서만 국정교과서를 만들라고 하느냐며 반대하고 있다. 

국정교과서가 없는 선진국들은 

민주주의 역사가 깊고 전쟁도 없이 오랜 동안 평화를 유지해 온 나라들이며 

더구나 한국처럼 분단국가도 아니며 역사에 대한 분쟁이나 

이념분쟁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국정(國定)교과서가 필요 없다. 


하지만 한국은 오랜 식민지 문화가 아직도 가시지 않고 

민주주의역사도 미천하고 분단국으로 이념이 갈리어 

역사관(歷史觀)이 백가쟁명(百家爭鳴;여러 학자가 다투며 말함))이다. 

더구나 한반도에는 분단 된 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신무기가 집중돼 있으며 

남과 북이 200만 명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어 

안보가 절신한 상황에 있다. 


이런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역사 성경(聖經)인 교과서마저도 

백가쟁명이어서는 안 된다. 

이런 때 국가는 이 혼란을 국정에 맞게 방향제시하고 

현실에 맞게 통제할 책임이 있다. 

분단국가도 아니며 역사적 분쟁이나 이념 분쟁이 없이 

오랜 동안 평화를 유지해온 나라들과 우리의 현실은 차가 있다.        


(이 글은 www.seoulvoice.com과 www.cafe.daum.net/mkchicago 문경 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민속 연구원 제459호 20151210  교11.13.08 & 3.5.09 charakwoo@hotm 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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