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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탄생 野話. 

청교도가 학대한 원주민 체로키족. 미국은 세계의 경찰  


청교도는 100명이아니라 35명 


영국은 국영체제의 국교만 허가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영국에 목사와 장로로가 있는 

회중교회(會衆敎會)가 생겼습니다. 

이 회중교회는 바로 지금의 장로교와 유사한 조직 으로

목사와 장로가 운영하는 체제입니다. 

독재적인 구교식 운영체제에서 벗어나 

회중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당시 영국에는 

국교(구교 舊敎)만 국교로 허가 했기때문에 

회중교회는 이단 종교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 영국에는 

목사와 장로가 있는 두 개의 회중교회가 탄생 했는데 

교회규모는 100명 정도 이었다고 합니다. 이 두교회는 네덜란드로 피난을 가서 

12년 동안 예배를 보며 인쇄업을 운영하면서 번돈으로 

“왜 칼뱅주의 신앙(장로교)으로 종교개혁을 해야 하느냐는” 이유에 대한 

선전문과 성경을 인쇄해 영국으로 밀수로 전도를 했습니다. 

이 일이 발각 되자 네덜란드 국왕도 회중교회를 추방했습니다. 


올데갈데도 없게 되자 목사가 

이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신대륙 미국땅으로갈 수밖에 없다는 안(案)을 냈고 

미국으로 가겠다는 지원자가 35명이나 되었습니다. 

앞길이 불확실했던 상황에서 칼뱅주의 신앙을 지키겠다며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미국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들에게 신앙의 상징인  “청교도”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이상하게도 안을 내고 주동했던 두 목사는 지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훌라워호를 타고 

미국을 향해 66일 동안 대서양을 항해 한 끝에 

미지의 땅 미국에 도착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발 디딘 해변가에 있는 한 곳을 제 1차 정착지로 정하고 

영국왕의 이름을 따서 재임수 타운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보스톤 인근입니다. 


이들이 미국으로 향해 떠나는데 배싻 700 파운드가 없어서 

무담보로(미국)무역회사로부터 돈을 꾸었습니다. 

배가 두 번이나 고장을 일으켜 

세 번째로 181 톤급의 메이훌라워호로 갈아 탔습니다. 

메이훌라워에는 이미 미국으로 

돈벌러가는 상인 65명이 상선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이훌라워에는 

선원 48명과 상인 65명과 청교도 35명을 합쳐  

총 148명이 일행이 됐습니다. 148명중에 청교도는 35명뿐었지만 

배에서 내리기 직전에 상인 65명도 청교도들과 같이 행동하겠다는데 

합의하고 연판장에 서명을 하고 미국생활을 같이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청교도수가 

100명(또는 101명으로 기록되기도 함)으로 된 것입니다. 

한 겨울이 지나자 굶주림과 병마와 추위로 죽고 반이 됐다고 합니다. 


추수에 감사. 땡스기빙 데이의 기원 

이들은 1520년 11월11일 

미국에 도착했지만 당장 먹을 식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인디언 원주민이 저장해놓은 겨울 식량 옥수수를 약탈(?) 했습니다. 

이에 놀란 원주민들은  왼 낯선 백인들이 들어와 식량을 

약탈해가자 비상이 걸렸습니다. 인디언 추장 마사소잇은 

휘하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공격해 왔습니다. 

청교도들은 장기간의 항해와 굶주림에 지쳐 반항할 기력도 없었고 

추위에 입을 옷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떨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원주민들은 먹을 것과 모피 등 입을 것을 갖다주며 연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자 원주민들은 백인들에게 

자기 농토를 주고 농사를 짓게 했지만 청교도들은 농사 지는데 필요한 종자도 없었고 

농사 지는 법도 몰랐습니다. 

 원주민들은 종자를 갖다 주고 씨뿌리는 법과 

채소 가꾸는 법 등 농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다행히도 대풍년이 들자 청교도들은 살길을 찾았고 

신에 감사하는 축제를 열었습니다. 

추장 마사소잇은 사슴 다섯 마리와 칠면조 등을 들고 

90여명의 원주민들과 축제에 참석했는데 

축제는 며칠동안이나 계속 됐다고 합니다. 

이날이 바로 11월 마지막 목요일입니다. 

그래서 미국정부는 후에 감사의 날로 선포하게 됐습니다.      


굴러온 돌이 백힌 돌 뺐다. 

체로키 인디언 땅을 백인들이 차지했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백인들이 원주민 인디언 체로키족의 땅을 뺏고 

수용소에 가둔 슬픈 애기가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엄동설한에 백인들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는 

참혹한 행렬을 “죽음과 눈물의 행진”이라고 합니다. 


미국남부 조지아주에 원주민 체로키족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습니다. 

이 인근에 백인 잔 베넷이라는 백인 소년이 있었는데 

잔 베넷은 어릴 때부터 강에 나가 고기잡이도 하고 

사슴 곰 멧돼지 등을 사냥하면서 소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사냥을 하러 나가면 원주민 체로키 인디언들을 자주 만났는데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인디언들과 사냥애기를 하는 등 친구가 됐습니다. 

하루는 사냥을 하고 있는데 체로키족의 한 청년이 총에 맞고 

죽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바위틈에 숨겨놓고 

상처를 싸매주고 사슴고기를 먹이며 돌보자 그는 살아 났습니다. 

잔 베넷은 그 청년을 체로키 마을로 데려다 주었고 

그 청년과 친구가 되어 체로키족들과 같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인디언 말도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1838년에 버넷은 인디언 말을 유창하게 하는 덕분으로 

스모키 마운틴 군대의 통역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미국 제7대 대통령인 앤두루 잭슨은 

조지아주 북부에 있는 체로키 원주민을 

오크라호마 수용소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잔 베넷은 이 때 체로키 원주민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데 통역관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잔 버넷은 

체로키족이 조상 대대로 오랫동안 정들였던 땅을 등지고 

추운 겨울에 수용소로 동물처럼 끌려가며 

어떻게 얼어 죽고 고생을 했는지를 목격한 증인이 됐습니다. 

잔 베넷은 체로키 족들이 집에서 끌려나와 총검으로 위협당하며 

한겨울에 스모키 산맥을 넘어 

수용소에 갇히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고 후에 증언 한 것입니다. 


1838년 10월 비가내리는 새벽에 체로키 원주민들은 

645대의 마차에 실려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담요도 없이 

맨발로 끌려가면서 무섭게 몰아치는 눈과 비속에서 

백인 병사들의 채칙을 맞으며 동물처럼 수용소로 끄려간 것은 

죽음의 행진이었다고 했습니다. 


1838년 10월에 부터 이듬해 3월29일까지 

한겨울에 스모키 마운틴을 넘으며 

죽은 사람은 4천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추운 밤에 마차위에서 

또는 맨 땅위에서 불도 없이 잠을 자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잔 베넷은 하룻밤 사이에 

26명이 담요도 없이 죽은 것을 보았다고도 했습니다. 


체로키족의 추장은 잔 로스라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내는 

잔 베넷이 야근하는 밤에 병든 어린아이를 살리려고 

한 장밖에 없는 자기의 담요를 아이에 덮어주고 

살갗을 에는 겨울밤에 죽었다고 합니다. 


백인들이 원주민을 박해한 역사를 

원주민들은 문자가 없었고 문맹이어서 

그들의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길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증언이나마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은 

잔 베넷이 80세 되는 1890년 12월 11일 날 

이웃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자기가 겪은 

옛날 얘기를 들려준데 서 나온 증언이라고 합니다. 

(미국인디언 고대 역사는 기록이 없다)

당시 미국정부는 전국에 320개나 되는 원주민 수용를 설치하고 

원부민들을 다 몰아다 수용소에 가두고 배급을 주어 살게 했습니다.    


흑인 대학원생. 미국은 세계의 경찰 

2년마다 노벨상을 배출해서 한때 노벨상의 산실이라던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대학원 연구실에서 

한 흑인 여학생과 자주 만나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이 흑인 대학원생은 돈이 없어서 어떤 때는 

아파트의 전기세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성화를 하기도 하고 

학교생활이 어렵 다는 말도 자주 했다.  

그 당시는 월남 전쟁이 한참이었던 때인데 자기는 미국 백인들이 

자기들이 세계에서 제 1가는 일등 국민이라고 자부하면서 

세계의 어느 나라 일이든지 간섭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심지어는 세계 경찰 노릇 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쿠바에도 그랬고 중동에서도 그랬고, 

지금 월남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도 그렇다며  

백인 우월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흑인들로부터 8% 지지밖에 얻지 못한 제43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안보 담당 보좌관으로 있다가(당시는 47세) 세계를 주무르는 

미 국무장관이 된 ‘곤돌리사 라이스’는 

명문 대학 스탠포드대 교수로 있을 때 

구소련을 연구한 학자이며 보수적인 흑인여성이다. 

그는 흑인 민권 운동의 발원지인 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태어났으며 

9살 때 백인 우월주의 단체인 KKK단이 

라이스가 다니는 교회에 장치해 둔 폭탄이 터져 

친한 친구가 죽는 것을 목격하는 등 인종 혐오와 차별을 몸소 겪었다. 

15세에 덴버 대학에 입학(정규 입학은 17세 아니면 18세)하고 

26세에 박사 학위를 받고 스탠포드 대학교의 전임 교수가 된 재원이다. 


이런 라이스가 2000년 2월 초 미국 외교 정책 전문 잡지 기고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미국의 국익에 맞도록 기초 해 해결해야 하고 

인권도 역시 미국의 국익을 우선 할 수 없다고 했다. 

공화당은 미군을 강화해야 하고(중략), 

미국은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국가로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미국이 경찰의 책임을 수행하는데 들어가는 경비는 

미국 혼자 감당해서는 안 되며 

해당 당사국과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오늘 날 현실이 됐으며 

중동에서도 동북아에서도(북한의 김정은 관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한국에서도 미군기지 평택 이동에 드는 

비용 분담과 주한미군 주둔비 분할에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 문제에 있어서 미국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고 

모든 것을 미국 국익을 제일로 하는 미국 우월론 자다. 


인종 도가니 미국은 비빔밥 문화

미국을 몇 자의 글이나 말로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미국을 쉽게 이해하려면 

“군대 사회와 교회와 같은 종교 집단”을 생각하면 된다. 

종교 집단을 살펴보면 구성원이 각양각색이다. 

신을 섬기며 종교 생활을 하는 목적은 같은데 구성원은 매우 다양하다. 

부자 가난 한자, 무학자, 초등학교 졸업자로부터 대졸자, 석 박사, 

농부와상인, 공무원, 교수 등등  

다른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종교의식을 행하며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한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오랜 동안 모여 동고동락하며 지내다 보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교회 일에 잘 협력하는 교우(敎友)가 된다. 

학벌을 내 세우지도 않으며,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도 않으며 

빈부를 따지지도 않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화를 이룬 

중도(中道)를 유지하는 공동체가 된다. 

높은 사람은 낮아지고 얕은 사람은 높아져 그 집단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사회다. 


어떤 사람은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쓰지도 못한다. 싸인을 하라고 하면 

종이를 거꾸로 돌려놓고 

자기 이름자가 어데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런 가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미국을 배우러 

너도나도 오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군대 사회도 국방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생활을 몇 년씩 한다. 

때에 따라서는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한다. 

군에 들어올 때 일자무식이던 사람도 글을 깨우치게 되고  

자기보다 지식이 높고 사회 경험도 많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맞나 새롭게 사회 문물을 배우게 된다. 

반면에 석사나 박사들은 자기들이 배운 전공 지식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수준에서 후퇴하는 것이다. 

즉 지식이 높은 자는 발전의 기회가 없지만 

상대적으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보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이들을 닮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군대사회도 교회 공동체와 같이 

그 나라의 중간 사회 수준을 유지하는 집단이다. 

미국 사회가 바로 그렀다. 

세계 각 나라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면서 모여 사는 곳이 미국이다. 

수많은 종족의 고유문화와 풍속과 풍습이 미국이라는 ‘도가니’에 들어와 

새 문화가 창조되는데 이것이 미국의 문화이고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미국문화다. 

그래서 미국 문화는 세계문화를 한데 비벼 논 비빔밥과 같다.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도 

미국 ‘비빔밥 문화’를 창조하는데 한 몫을 담당하고 크게 한 몫 단단히하고 있다. 

한국인들을 미국의 일반 수준과 비교해 보면 

교육 도덕 근면한 면에서 중상(中上)은 넘어 보인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 인구의 0.4%에 불과 하지만 

중상(中上)의 위치에서 미국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미국에 상위권에 속해 있고 

미국문화를 위에서 이끄는 형세에 있다. 

(

이 글은 www.seoulvoice.com과 www.daum.net/mkchicago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민속 연구원 20151224 제461호 charak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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