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2 09:46
최태민과 박근혜. 최태민과 김재규의 갈등이 10.26의 동기와 발단.
박정희 서거 37 주기
한국의 妙僧 최태민이 박근혜 지배.
2007년 주한 미 대사관이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씨가
과거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를 지배했으며 최태민의 자녀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본국에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10월27일(2016)
폭로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2007년 7월 16일 당시 주한 미 대사관 윌리암 스탠턴 부 대사는
당시 한국 대선 전망에 대한 전문을 작성했고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가 이를 기밀로 분류한 뒤 본국에 보냈다.
당시는 박근혜가 이명박과
한나라당 대선 후보자리를 놓고 경선을 펼칠 때다.
스텐턴 부 대사는 전문에서 박근혜후보는 35년 전 최태민씨가
육영수여사의 서거(1974년) 후 퍼스트레이디로 있던
박근혜(후보)를 지배했다는 설을 비롯한 과거를 설명해야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며 박근혜의 반대세력(이명박)들은최태민씨를
한국의 “라스프틴”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했다.
라스프틴(1869-1916)은 러시아 희대의 요승이다.
제정러시아 최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와 황후의 총애를 얻어
황태자의 병을 기도로 고친다며 국정에 개입해
온 갖 전횡을 일삼아 러시아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전문은 이어 카리스마가 있는 고 최태민씨는
인격형성기에 박근혜 후보의 심신body and soul을 완전히지배했다.
그 결과 최태민 자녀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또 전문에는 박근혜 후보와 최태민씨의 특이한 관계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스탠턴 부 대사는 재산 형성과정에서
축재의혹(김경준과 그의 누이 린다 김과의 관계)을 받고 있는
이명박 후보 측이 박근혜 후보가
도덕적으로 무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 했다.
주한 미 대사관의 이 같은 보고는 당시 이명박 후보 측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정윤회를 비롯한 최태민 일가가
정권남용을 할지도 모른다고 제기 한 의혹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 신돈은 한국판 라스프틴
고려말에 고려조정을 흔들었던 신돈은
러시아의 라스프틴과 비교되는 요승이었다.
땡 중인 신돈이 공민 왕 앞에 등장한 것은 공민왕비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자 스스로 공주의 진영을 손수 그려 놓고
밤이나 낮이나 마주보고 앉아 애통했으며 3년 동안이나 육식을 피했다.
유례가 없을 만큼 노국공주를 추모했다.
이렇게 상심하던공민왕 앞에 요승 신돈이 접근했다.
공민왕은 신돈을 신임했다. 마침 공민완은
새정치를 표방하던 차였으며 이를 알아챈 신돈은 토지정책을 개혁해
백성들은 문수보살이 왔다고 신돈을 칭송했으며 초기에는
공민왕과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다.
신돈의 어머니는 계성현 영산 옥천사의 여종이었으며
신돈은 어머니 때문에 어려서 중이 되었는데 어릴적 이름은 편조였다.
어느날 공민왕이 꿈에 한 자객에게 쫓기다가
어떤 중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공민 왕은 주위에 꿈 얘기를 하고 그런 중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측근에 있던 김원명이 임금의 꿈얘기를 듣고 한 중을 데려 왔는데
그 중의 모습이 꿈에서 본 중과 흡사하게 같았다. 그가 신돈이었다.
그래서 왕은 신돈을 만나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냐 공민왕의 자식이냐?
공민왕은 후사가 없자 신돈과 함께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후사를 보지를 못했다. 그러던 사이 공민왕은 궁궐 바로 뒤에 있었던
신돈의집을 무시로 드나들다가
신돈이 숨겨둔 반야라는 미인을 보고 총애하게 됐다.
공민왕의 사랑을 받은 반야는 1365년 아들을 생산 했는데
이가 공민왕의 왕위를 물려받은 우왕이다. 우왕의 이름은 모니노였다.
모니노가 8세되던 해에 신돈이 역모죄로 죽자 공민왕은
모니노를 태후궁에 데려와 키웠다. 신돈이 죽자 공민왕은
수시중(지금의 총리에 해당)으로 있는 이인임을 신임하게 되었다.
왕은 이인임에게 신돈의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 가까히 했더니
아들을 얻었다며 내가 불교를 믿다가 낳은 자식이라
이름을 모니노라고 했다고 했다. 그리고 모니노를 세자로 삼겠다고 했지만
주위의 반대로 세자로 세우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모니노를 궁에 두고 키우며 이름을 우라고 지어주고
우가 이미 죽고 없는 궁녀 한씨의 소생이라고 선포했다.
공민왕이 이렇게 한 것은 모니노의 친모가 신돈의 비첩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됐다.
하지만 그후 우왕은 요승 비첩 반야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됐고 후에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조선으로 역성혁명 하는데 성공했다.
박대통령, “저더러 사교에 빠졌다고하더라구요”
박대통령은 지난 10월30일(2016) 사회각계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최순실 파문 수숩책을 논의 했다.
한 참석자가 야당과 사회단체는 원래 대통령을 그렇게 공격하는 것이니
너무 위축되지 마시라는 취지로 말하자 이에 대해 박대통령은
“저 한테 사교에 빠졌다는 말까지 하더라구요”라고 반응을 했다고
한 참석자가 말했다. 참석자들이 돌려가면서 의견을 말할때
통령은 아무 말없이 수첩에 메모를 했으며 다른 말은
입밖에 없었고 이 발언이 유일했다고 한다.
전두환 사령관이 건네 준 6억원의 향방은 최태민 부 축적의 종잣돈?
여태까지 알려진 바로는 육영수 여사가 숨진 다음해에 최태민이
“현몽”을 이유로 박근혜 당시 영애에게 접근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 전부터 연관이 있엇다는 증언이 나왔다.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은 11월1일(2016)
cbs라디오(김현정 뉴스 쇼)에 나와 증언했다.
바근령씨가 언니에 대한 최태민의 접근을 최초로 목격한 시점은 틀림없이
어머니가 서거하기 이후가 아니라 어머니 살아 생전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박근혜 영애의 행사가 많이 있었는데
그 행사장에 최태민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영애가 동선과 행동이 잘못 틀어지게 되면
경호나 사정기관에 포착되게 되는데 그게 여러번 겹치면
신원조예(관계된 사람들을 조사)에 들어가게 됐다(된다).
이런 것이 아버지인 박정희대통령에게는 보고할 만한 사항이 아니었고
육영수 영부인께만 먼저 보고가 들어갔다고 했다.
이런 보고를 받은 육영수 영부인은 이런 사람들은 조심해야하고
주의해야한다고 딸 박근혜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박근령씨는 기억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후19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이 서거하고
1981년 성북동으로 이사한 후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최태민 일가가
본격적으로 박근혜에게 접근했다고 말했다.
성북동으로 이사한 시기에 최태민 최순실씨가 재 등장으며
이때 최태민 일가가 옆에서 집사, 재산관리를 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참고; 최태민의 5번째 부인의 소생 4명의 딸중에 두째 최순득 (64)은
섬심여고 8기로 방근혜와 동기생이다>.
2006년 5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오세훈 서을시장 후보 유세에 나갔다가
칼침 맏고 요양한 곳이 순득이네 집이었고 2007년 대선에 낙선 했을때도
순득이네 집에 머물렀다.
박근령이 이혼 한 후 미국으로 떠나 있을때
1년간 매달 같은 날짜에 언니로부터 생활비를 받았는데
돈은 언니가 보내는 것이지만 송금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게 최태민 일가중 한사람이라고 박근령은 기억한다고 전했다.
1984-85년 비자갱신을 하기 위해 귀국했는데 당시 반포아파트 한채를
언니가 사줬는데 이것이 정말 언니가 사준 것인지
최태민 일가가 사준 것인지 수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가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받은
위로금 6억원의 향방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참고; 후에 2억 5천만원을 추가로 더 주었단 말도 있다>
70년대 말의 화폐가치로 계산하면 강남의 한 아파트 한채가 200만 원이었고
6억원은 아파트 30채가격이다. 어찌 됐건 박근령은 언니로 부터
아파트 한채를 받았고 박지만 회장도 그 당시 아파트 한채가 있었다며
(이것도 박근혜가 사주었다고 할 때) 나머지 298채 아파트 값은 어디로 갔을까?
그게 박태민 일가가 부를 축적한 시드머니로 갔을 확률이 높다고
우리는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참고; 2012년 이정희 통진당 대표가 대통령후보로 나왔을때
TV 대선 후보 디베이트에서 자기는 박근헤후보를 대선에서 떨어트리기 위해
입후보했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준 6억원에 대한
세금을 냈느냐고 박근혜 후보에게 질문했다.
그 때 박후보는 화들짝 놀래 머뭇하며 그 돈은 내가 아버지를 읺고
어려운 처지에 있을때 경황중에 단지 위로금으로 알고 받았다며
그돈은 기회가 되면 사회에 반환하겠다고 이미 말한바 있다고 답했다).
10.26 궁정동 박정희 살해. 김재규와 최태민 갈등에서 발단?
김재규의 항소이유 보충서에 박근혜 영애와 최태민의 이야기가 나온다.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한다며 이야기를 했다.
구국여자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 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비서관 조차도
말도 못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한 적도 있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정희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중정이 조사한 보고서)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 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하기는 커녕
오히려 박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 돼 있을 것입니다(1980년 1월28일 김재규)
고자질한 김재규에 박근혜영애의 원한
최태민은 당시 정보부장 김재규를 싫어하고 음해했는데
이 같은 생각을 박근혜에게 말했고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에게 졸라 김재규를 경질하라고 졸랐던일이 사실인가?
김재규가 이런 저런 사건들 때문에
박근혜의 미움을 받았다는것이 최태민 때문인가?
김재규는 항소심 공판에서 최태민 사건이 박정희 궁정동 시해를 유발하게한
동기의 하나라고 진술했지만 전두환 12.12 군사재판부는
김재규의 이 진술을 무시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최태민은 박정희 서거후 1980년 보안사에 의해 강원도로 쫓겨 났지만
박근혜가 전두환에게 간청해 다시 서울로 오게 했다고 한다.
비서실장 김계원의 인터뷰(11/1/1998 월간 중앙)
(박정희대통령은) 나보고 갑자기 최태민이를 아는가하고 물었다.
김재규한테 들었다는 말은 안하고 예 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놈이 말이야 근혜를 홀려가지고 내가 혼을 내줬지 했다.
대통령은 그년(근혜)이 그놈한테 홀려 도무지 시집가려고 해야말이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재혼 할수 있겠나 했다.
박근혜가 총재로 있는 새마을 봉사단과 관계된 비리가 적지 않아
치안본부와 민정수석실과 중안정보부 등이 직접 조사에 나서
비리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했다.
박정희(당시 57세)는 유부남인 최태민 (당시62세)과 딸 박근혜(23세)를 나란히 세워놓고
직접 최목사 비리에 대해 증거재료를 내 밀면서 친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극구 최태민을 변호하고 나서자 박정희 대통령은
관계된 당사자들을 모두 불러 몸소 친국을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박정희대통령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직접 조사하고 난 후에도
박대통령은 이들을 감쌌다고 한다.
김계원 전 비서 실장은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10.26혁명(궁정동 박정희 시해사건을 말함)의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김재규는 큰 영애인 박근혜가 관련된
구국여성봉사단의 부정과 행패를 보고 분개했다고 해요라고 했다.
(김재규는)이런 일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근혜자신에게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고 조사를 시켰다는 것이다.
조사결과 이권 개입 등 여러 비행이들어 나타자 깁재규는
박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 했는데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이런 일까지 하느냐면서 몹시불쾌해했다고 증언했다.
육영수가 죽은후 박정희는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 돌았다고 한다.
당시 항간에 말이 많던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는 치태민이었고
박근혜가 명예총재를 맞고 있었는데 김재규가
구국여성봉사단의 문제점을 보고한 후 박근혜가 총재가 되고
최태민이 명예총재로 바뀌었다.
박정희가 두사람의 자리를 바꿔놨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자기가 괜히 조사를 해서 오히려 개악이 됐다면서
조사한 것을 후회 했다고한다.
김재규는 이런일 때문에 박근혜의 미움을 받았다.
박근혜가 당시 김재규의 경질을 박대통령에게 조르고 있었다.
그래서 김재규는 항소심 공판에서 최태민 사건이 박정희시해의
동기를 제공했다고 진술한 것이라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전두환 본부장 지시 최태민 긴급체포
전두환 본부장의 지시로 최태민을 긴급체포해 조사를 벌이던 중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학봉 중령은 박근혜씨가
최목사 구속 이후 전부장에게 찾아와서 최태민을 석방해달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서울을 떠나는 조건으로 풀려주었다고
증언한바도 있다.
최태민은 1994년 지병인 만성신부전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82세)
(이글의 출처는 미국양키 타임스)
박정희 서거 제 37 주기. 나같은 불행한 군인 나오지 말아야
최순실 논란속에 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제 37주기 추도식이
동작동 국립 현충원애서 1시간 진행 됐다.
약 2000명의 내빈이 모였다. 과거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라고 한다.
한 참석자는 순진한 박 대통령님이 당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추도식에는 박근혜동산, 뉴박사모, 박사모, 폔클럽 회원 등이 참석했다고 한다.
회원들은 박대통령을 위해 언제든 나설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최순실은 죄값을 치러야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추도식에는 박지만 박근령 등은 참석치 않았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과 이인재 전의원 등이 있었다.
박정희 육군대장이 1964년 8월30일 한 많은 군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군인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정희는 부인을 비명에 보냈으며
사랑했던 자식들은 아버지 어머니 생일날에도 제삿날에도 명절날에도
한자리에 모여 아버지 얘기도 못하고 성묘도 못하고 있다.
(이글은 www.seoulvoice.com과 www.cafe.daum.net/mkchicago 문경학회 난에서도 볼 수있음>
<한국 민속연구원 제504호 20161103 charakw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