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통 체포 실패. 과부의 묘수.
미국엔 린컨과 씨워드, 조선엔 정종대왕과 정적 심환지.
한 맺힌 여성 혜경궁 홍씨의 한증 록.
용산 대통령관저 결투 일파만파
아리랑 아리 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 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김상현 충의가. 병자호란 인조임금 때 이조판서 귀양가며 )
과부가 머슴 홀린 묘수
옛날에 부잣집 과부가 남편을 일찍 잃고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다. 농땡이치고 꾀를 부리던 머슴꾼 놈들이 이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가 기만하면 뼈가 빠져라 열심히 일했다.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무성 했지만 과부에게는 머슴들을 구슬리는 비상한 비법이 있었다. 과부는 머슴꾼 박서방이 들에서 일하다 연장을 가지러 집에 들어오면 안으로 불러 박서방 더위에 애쓴다며 막걸리 한 사발을 직접 퍼서 주었다. 김서방이 집에 들어오면 김서방에게도 수고 많이 한다며 광에 들어가 술도가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 떠서 주곤 했다. 김서방이 없을 때 박서방에게, 박서방이 없을때 김서방에게 막걸리를 주었다. 머슴 박가와 김가는 제 각각 과부가 특별하게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는 줄 알고 마나님 마나님 하며 일을 잘했다. 마나님은 농땡이 머슴을 잘 부리는 묘수를 알고 있었다.
조선 22대 정조임금과 정적 영의정 심환지
정조임금은 조선의 후기 르네상스를 이룬 임금으로 조선전기의 세종대왕 후기엔 정조 가 있다. 정조(이산. 사도세자의 아들)는 온나라가 시파(지금의 여당)와 벽파(야당)로 당쟁이 최고조에 이르러 나라의 안위가 극도로 불안 한 때 25살에 22대 임금으로 보위에 올랐다. 정조는 임금이 되자 자기편이든 정적이든 필요한 사람에게는 어서(임금이 보내는 편지)를 보내 여론을 수습하면서 나라일에 협조를 구했다. 벽파든 시파든 임금의 편지를 받은 신하들은 임금의 어찰를 받으면 소중히 여겼고 절대 권력자인 임금이 자기를 알아준다고 감복하고 고마워하며 임금의 부탁을 잘 들어 주었다. 그대표적인 사람이 벽파의 수장 심환지다. 정조는 진보적인 시파(時派 남인)였고 심환지는 극구 수구적 보수 벽파(僻派노론)의 수장이었다. 정조가 정적인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는 모두 350 여 통(어찰 첩에 만 297개)이나 된다. 정조는 정적인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극비로 어찰을 보냈다. 심환지는 어찰을 보고서도 못 본척 듣고서도 못들은척 정조가 보내는 비밀친서에 적혀 있는 그대로 실천했다. 정조는 비밀이 탄로 날까봐 심환지에게 편지 말미에 편지를 읽고 불살라 없애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정조가 보낸 어찰을 불에 태우지 않고 며칟날 받았다는 날짜를 명시해 보관해 두었는데 200년이 지난 지금 그 비밀어찰이 발견되어 역사적인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어찰에 담긴 내용은 승정원일기(지금 대통령비서실 일지)와 이조실록은 물론 임금의일기 일성록(日省錄)에도 정조가 심환지에 보낸 비밀서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심환지를 따르는 벽파들은 심환지가 정조임금과 어서를 받고 그 내용대로 실천 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심환지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고 지지했다. 정조는 이조 후기 극도의 당파싸움을 심환지를 통해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어 조선 후기의 대왕으로 이조 후기의 추앙 받는 임금으로 기록되었다.
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조의 어찰에서만 볼 수 있는 史實
비밀 어찰에는 승정원일기와 실록에도 없는 역사적 사실(史實)도 있고 배치되는 부분도 있고 보완적인 사실(事實)도 있어서 정조대의 역사를 다시 재조명할 만큼 정조의 치적과 숨겨진 통치술을 엿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정조는 정적 심환지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영의정으로 제수해 국시를 처리하게 하고 목적이 달성되면 영의정에서 물러나게 하기를 세 번이나 거듭했는데 그때마다 정조는 미리 심환지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양해를 비밀편지를 통해 알려 주었고 심환지는 비밀편지에 있는 대로 순종하면서 신하의 도리를 지켰다. 이는 마치 미국 16대 린컨 대통령이 선거에 이지자 공화당 정적 씨워드를 찾아가 밤새워 토론하고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하게하고 국무장관을 제수한것과 유사하다. 씨워드는 온 국민이 반대하는 소련땅 동토 아라스카를 에이커당 2전씩에 구입헸다(7백20만 불). 지금은 미국에서 제일큰 주이며(약 한반도의 7.8배). 광물의 보고이며 돈을 벌어 주민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효자주가 됐고 러시아를 망보는 첩보기지가 됐다.
정조는 밤새며 신하들에게 어찰
정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중진 사대부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한 신하를 지목해 어떤 내용으로 상소를 쓰라고 문안까지 알려주고 상소를 올리게 하고 그 상소가 어전에 올라오게 되면 사대부들이 그 상소에 대해 공론하게 하고 그 결과를 보고 비답(임금이 하는 답)을 내려 여론을 무마하기도 했다. 상소 정치를 한 것이다. 자기가 알고 싶고 듣고 싶었던 사대부들의 중론을 그런 술수를 써서 알아 본 것이다. 정적과 소통하는 길이 막혀 있고 사대부들의 중론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속을 알고 길을 트기 위한 방편이었다.
승정원일기(지금의 국무회의 일지)
승정원일기에는 심환지가 올린 것으로 기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상소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지시를 해서 심환지가 써서 심환지의 이름으로 올렸다는 내용이 비밀 어찰에 나타나 있다. 정조가하고 싶은 일을 정적인 벽파의 수장 심환지를 통해 상소를 올리게 했으니 벽파들은 자기의 수장인 심환지가 올린 상소가 정조의 뜯이아니고 심환지의 뜻인 줄 알고 반대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이산). 미국엔 링컨 조선엔 정조대왕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을 때 아직 임금이 되기전 나이 어렸던 이산(후에 정조)는 뒤주에 구멍을 뚫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먹을 것을 넣어 주고 할아버지(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원 했다. 정조가 아직은 임금이 아니지만 만일 후에 정조가 임금이 된다면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여야 한다고 영조에게 상소 했던 벽파 노론 사람들을 정조가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 죽이게 될 것이므로 정적 벽파 노론(야당)들은 정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이려 했다. 이 사실을 안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뒤주에서 죽을 때는 시아버지 영조와 친정아버지 홍인한 당시 영의정이며 벽파(야당)기세에 눌려 말도 못했지만 아들 이산 (후에 22대 정조대왕)을 정적들이 죽이려 하자 아들만은 살려야한다고 구명운동을 했다.
한 많은 여성 혜경궁 홍씨의 한증 록. 홍국영의 세도정치.
홍국영은 정조의 보위운동에 적극 참여 했고 정조에 충성을 다 했지만 그의 세도정치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김종수가 홍국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정조는 이상소를 가납해 홍국영을 귀양 보냈다. 김종수의 상소도 김종수가 쓴 것이 아니라 정조가 김종수에게 홍국영을 탄핵하는 문안을 써 주기까지 하면서 국왕인 자기에게 상소 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실은 실록에는 김종수가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한증 록에는 사실대로 정조의 지시에 의한 상소였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정적끼리도 중간에 협상통로(사꾸라. 지금의 정무장관)가 있어야 숨통이 트일 때가 있다. 통로가 꽉 막히면 상방의 속심을 모르니 싸움만 하게 된다. 벽을 쌓고 싸우는 것은 정치도 아니고 의리도 아니고 목적을 달성하기도 어렵다.
정조가 정적에 보낸 편지, 막힌 정국 풀어
꽉 막혔을 때 정조는 정적인 벽파의 수장 심환지에게 밤을 새우며 비밀 편지를 써 보냈고 심환지는 어철을 받고 비밀을 지키면서 정조의 뜻대로 실천해 막힌 정국을 풀어 가는데 큰 힘을 보탰다. 심환지는 정조의 정적이면서 정치파트너로서 역할을 잘해 태평성대를 열었다. 정조의 비밀 어찰첩이 발견 된 지금 심환지가 정조에게 협조 한 것을 200년이 지난 지금 나쁘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며 싸우다가도 돈이란 눈먼 매개체가 중간에 있어 서로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협상을 하게 한다. 돈이 장사꾼들(사업가)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영원한 원수는 없다. 장사꾼이 싸우다 협상하면 아 그거 돈이 죄가 있지 사람이 원수냐며 스스로 불편했음을 위로한다. 과부가 머슴을 잘 구슬려 일 잘하게 한데는 말 못하는 막걸리가 있었다. 정조가 명군이 된 데에는 귀먹고 눈멀고 벙어리 된 심환지가 있었다. 정치에도 과부의 눈 먼 막걸리 남과 북 사이에도 눈먼 막걸리 눈멀고 귀먹은 심환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차락우 칼럼 www.seoulvoice.com <한국 민속연구원 제458호 20151203
charakwoo@hotmail.com> (1/2/25 교차로 휴간의 대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