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4 20:12
청교도 추수감사절의 유래
미 국회, 인디언 원주민에게 잘못했다고사과
돌 굴러온 돌과 박힌
백인, 미국 원주민에 사과
미국 의회가 2010년 5월 20일, 아메리칸 원주민인 인디언에 과거의 폭력행위와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Sam Brownback 캔사스 주 상원의원은 워싱턴 DC에 있는 의회묘지에서 과거 미대륙 원주민 인디언들에 대한 사과 결의안을 낭독했다. 의회묘지에는 미국 정부에 대항하다 숨진 인디언 부족 지도자 36명이 묻혀있는 곳이다. 행사에는 체로키 등 5개 (원주민)부족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번 결의안에는 과거 미국정부가 자행한 약탈행위와 잘못된 정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미국(白人)을 대신해 사과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원주민들이 현재 보호구역 안에서 겪고 있는 빈곤과 폭력, 학대, 무시에 대해서도 유감을 표시했다. 브라운백 의원은 2004년부터 이 결의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결과 연방 상하원은 2009년 이를 통과시켰고, 오바마 대통령은 결의안에 서명했다.
원주민 몰살 낙태 강제이주 종교불법화 폭력학대에 대한 사과
인디언들은 원래 남동부 여러 지역에 거주했지만 1838년 미군들이 이들을 한곳으로 통합시켰다. 현재 인디언은 미국 인구의 1.5%(450만 명)이며 이들의 25%가 빈곤층으로 알려졌다. 이번 결의안은 미국이 "몰살 낙태(출산 금지)강제 이주, 전통종교 불법화, 성지 파괴 들을 자행한 (원주민과의)협정위반 및 잘못된 연방 정책 등을 인정하고, 모든 아메리칸 인디언원주민들에게 미 국민들이 저지른 폭력, 학대, 방치 등에 대해 미국민(백인)을 대표해 사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90년 부시 대통령이 의회의 결의에 근거해 11월을 “인디언 유산의 달“로 지정한 이후 매년 이를 지켜오고 있다. 2008년에는 의회가 추수감사절 다음날을 ”인디언 유산 기념일“로 지정하고 이날을 공휴일로 만드는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분리주의자 청교도는 영국에서 나왔다
영국 왕 헨리 8세(1509-1547)가 자신의 결혼문제(6번 재혼)로 1533년 로마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1534년 영국국회의 승인을 받아 영국국교(성공회 Anglican Church)를 만들어 자신이 수장이 됐다. 이에 반대한 종교인들이 중심이 돼 헨리 8세가 창설한 영국 국교를 반대한 일파가 탄생했는데 이들은 철저한 칼뱅주(현재의 장로교와 유사)의 신앙을 신봉했으며 이들은 영국국교에서 분리해 독립했다. 그래서 분리주의자Separatest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신앙심이 철저하다고1560년부터는 신앙이 청교도Puritans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이들은 헨리8세가 만든 영국국교(성공회)는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거기서 예배를 드릴수가 없다며 따로 예배를 봤다. 그리고 영국국교는 국법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국교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면 투옥 추방 사형 등의 형벌이 가해져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결국 청교도들은 네덜란드 암스텔담으로 이주해 1608년에 침례교회를 세웠으며 청교도들은 인쇄업을 하면서 칼뱅주의 종교사상을 담은 인쇄물을 영국에 밀수하다 적발됐다. 영국정부는 네덜란드 왕실에 압력을 가해 청교도들의 인쇄소를 몰수하고 투옥하는 등 추방 까지 당했다. 청교도들은 갈 곳이 없게 되자 마지막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민가기로 결정했다.
청교도는 35 명
네덜란드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 가겠다고 지원한 청교도는 모두 35명이었다. 이들은 영국 이민공사로부터 배 삯을 융자받아 범선 메이훌라워호(181t급)를 타고 미국으로 출발했다. 배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미국으로 가는 장사 꾼과 이민자들이 65명이나 미리 승선해 있어 배에는 청교도 35명과 선장등 선원48명 모두 148명이 1620년 9월16일 시속 2노트로 신 대륙 아메리카를 향해 떠났다. 66일 만인 11월11일에 미국 매사추세스주 보스턴 서남쪽에 있는 케이프 코드 반도 프로빈스타운에 정박했다. 남자 72명 여자 29명 승객은 모두 101명이다(참고 101명 102명설도 있지만 메이훌라워 규약에 서명한 수는 101명이다). 101명은 미지의 땅 무법천지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35명의 청교도들과 65명의 장사꾼 등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륙에 도착한 후 어떻게 될지 장래에 대해 서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행동통일을 하겠다는 동의를 얻어 하나의 엄격한 행동 규약을 만들었다. 이것이 101명이 서약한 메이훌라워 규약Mayflower Compact이다. 이로서 101명은 행동통일이 가능해졌고 청교도들 지휘 하에서 일치단결했다. .
첫 이민 정착지는 프라이 Plymouth 므스
청교도들은 66일 동안 모진 풍랑과 싸우며 물 부족, 음식부족으로 지칠 대로 지쳤다. 그래서 원주민의 곡간에 들어가 옥수수를 들고 나와 연명해야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륙에 왔지만 제일 먼저 한일은 식량구하는 일(도적)이었다. 프라이므스Plymouth 는 청교도들의 정착지로 발전 했고 영국에 청교도 촌으로 소문이 났다.
청교도 이민촌의 축제. 추수에 감사
청교도들은 농사법을 몰랐다. 원주민들은 농사짓는 법과 고기 잡는법 옥수수 보리 밀 감자 호박 등을 재배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원주민 추장 마사소잇은 부하 60여명을 거느리고 청교도들과 잘 지내자는 불가침 조약을 맺고 가을 추수까지 보살펴 주었다. 마침 그해는 풍년이 들어 청교도들은 식량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되자 기쁨에 넘쳐 감사 축제를 드리게 됐다. 마사소잇 추장은 부족들을 데리고 사슴 5마리와 야생 칠면조 토산물 옥수수튀김 등을 가지고 가서 축하했다. 그 날이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다. 축제는 여러 날 계속되고 고난과 역경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생사를 헤매던 그들에게 살길이 열렸다. 이제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살길도 찾았다.
청교도가 만난 최초의 원주민은 추장 마사소잇
청교도들은 한겨울을 지내는 동안 101명중 절반이 폐결핵과 독감에 걸려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50명이었다. 이렇게 새로 청교도들이 인디언 땅에 들어오자 주위에 있는 원주민들은 낯선 백인들이 위협이 되었고 비상이 걸렸다. 주위의 인디언 원주민 부족”의 추장 마사소잇은 청교도 촌을 포위하고 쳐들어왔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대항할 기력이 없었다. 추장 마사소잇은 청교도들이 병들고 굶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게 되었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이들에게 식량과 침구 등을 주어 한 겨울에 연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때 추장 마사소잇은 청교도들을 전멸 시킬 수도 있었다.
예기치 않은 청교도 촌 전쟁. 굴러온 돌과 박힌 돌 1621-1622년 2년 사이 영국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몰려 들러왔다. 그리고 이들은 무기를 들고 인디언 부족들의 식량과 재산을 약탈해가는 일이 빈번해졌다. 피해를 입은 원주민 여러 부족들이 연합해 청교도 촌을 습격해 오기에 이르렀다. 청교도들은 작전을 세웠다. 만찬을 준비해 놓고 평화협정을 맺자며 인디언 부족장 4명을 초대해 놓고 청년 8명을 무장시켜 잠복시켜 놓았다가 부족장들이 협정을 맺기 위한 만찬장에 도착하자8명의 청년들이 추장 4명을 살해 했다. 그리고 그들의 목을 긴 장대 끝에 매달아서 20년 동안이나 청교도 정착촌 프리므스 입구에 매달아 두었다(참고 청교도들도 생명에 위협을 느껴 원주민을 경계하는 조치였을 것이다). 이후 주위 원주민들은 무기를 든 청교도들은 살인마 목자르는 악마라 외치며 도망갔고 이민자들은 도망간 원주민들의 집과 토지를 차지한다는 소문을 듣고 영국 내 청교도들은 영국 정부의 박해를 피해 줄줄이 미국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청교도들의 수가 늘어나자 청교도들은 토지가 더 필요하게 되었고 토지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원주민들의 땅을 약탈했다. 미국 땅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형국이 됐다. 백인들은 인디언들만 살게 하는 보호구역을 만들어 인디언들은 이 보호구역에서만 살게 했고 온 땅을 차지했다.
재구성함 요약 4/14/2025 >charakwoo@hotmail.com 20191114 호657제 차락우 남송 민속연구원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