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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사형선고. 김정일과 정주영. 

박정희와 세종대왕 1등 聖君 



박정희 사형 날짜 받고 죽을 날 기다려   


박정희는 남로당원으로 있을 때 직책이 

“대한민국 군대를 책임지는 남로당 군사 책임자”이었음이 확증되어 

사현선고를 받고 철원 사형장으로 끌려 갈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방첩대에 김점곤(후에 장군)이 있었다. 김점곤이 강원도 춘천 8사단 

중대장으로 있을 때 박정희는 소대장이었고 

박정희는 김점곤의 술 신세를 많이 졌다. 

박정희는 술만 취하면 일본에서 있었던 2.26 사건을 뇌었다. 2.26 사건은 

1936년에 일본의 우익 장교 1483명이 일으킨 쿠데타 사건이다. 

박정희는 그때부터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었다고 김점곤은 회고 했다. 


박정희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한사람은 

박정희와 육사 동기생인 김안일이다. 박정희가 사형선고를 받고 

방첩대(명동 옛날 시공관)지하실에서 사형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을 때 

김안일은 방첩 과장이었고 그 밑에 보좌관으로 김창룡 대위가 있었다. 

김안일은 박소령(박정희)은 훌륭한 인재라며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방첩대 대장인 백선엽에게 구명운동을 했다. 

특히 박정희 소령은 작전계획에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며 남로당 내부의 좌익 빨갱이를 색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남로당에 가입한 것을 

본인 자신도 크게 후회하고 있다며 또 

기록상에도 남로당을 위해 한일이 없다며 

이 사람을 한번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박소령(박정희)이 한번 백선엽 대장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며 

김안일 과장이 간곡히 부탁을 해서 백선엽은 

박 소령을 집무실로 불렀다. 

수갑 찬 박정희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한번 살려 주십시오”라는 간단한 말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말 한마디로 자기 생사를 좌우하는 방첩 대장 앞에서 취한 

그 꿋꿋한 자세에는 비굴한 면을 엿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백선엽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해 보도록하지요”하고 사면 절차를 밟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박정희와 혁명주체 육사 8기생들과의 만남 


2차 대전 중에 독립투사들은 중국으로 구소련으로 망명도 했고 

일본으로 유학한 사람들도 있었다. 

3.1 만세 운동은 일본 유학생 모임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에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들에게 구소련 공산당이 일본의 침략을 

막기위해 운영 자금을 조달 해주며 조직한 공산 사회주의 단체들이었다. 

중국이나 구소련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를 찾겠다고 

애국 운동 단체에 가입해 보면 공산 사회주의 단체였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물들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소련공산당이 북한에 들어오게 되었고 

이들은 농촌과 농민을 먼저 공산화하면 도시도 

쉽게 공산화 시킬 수 있다는 이론(모택동 사상)에 근거해 

북한을 위시해 남한에서도 농촌에 있는 소작인들과 머슴살이하는 

빈민들을 공산당에 가입 시키고 소작인들에게 지주의 땅을 분배해주고 

나무지게 지던 문맹자 머슴들에게 인민위원회 위원이나 세포 위원장 등 

공산당 조직의 감투(완장)를 주면서 농촌을 공산화 하려 했다. 

이들이 바로 박헌영이 주도한 남로당(후에 보도연맹)이다. 


그러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공산당을 숙청하기 시작하자 

남로당원들은 월북하기도하고 지하로 숨게 되었다. 

대한민국 군대가 지원병을 모집하면서 공산당에 가입 했던 사람이라도 

군에 입대하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고 하자 남로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 

모두 군대에 지원했고 군대에는 남로당 전과자가 득시글거렸다. 


그 결과 여수에 있던 14연대가 제주도 4.3폭동 진압명령을 받고 

제주도를 향해 출동한 것이 반란군으로 돌변해 여수반란사건을 일으켰다. 

또 3.8선에서는 한 중대가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군에서는 방첩대를 창설하고 빨갱이 숙군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방첩대를 창설한 사람이 백선엽이다. 

방첩대는 무소불위 군 권력기구로 방대해자 인원이 더 필요했다. 

마침 육사 8기 1200명이 졸업을 앞두고 방첩대에서 

인원을 확충하기 위해 성적순으로 졸업생 100명을 면접하고 

그중 31명을 차출했는데 이중에 김종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박정희는 사형을 면제 받고 방첩대에서 민간인 군속으로 

근무하면서 호구지책을 면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사건으로 군대에서 사형을 받았던 전과자 이었기 때문에 

육사에서 차출 돼 온 8기생들과는 잘 어울릴 처지가 못 됐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박정희는 정식으로 군에 복귀하해 

육군본부를 따라 대전 대구 부산으로 남하 하는 과정에서 

육사8기생들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이때 김종필은 박정희와 방첩대에서 함께 복무하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박정희는 자기 여 조카 박영옥 교사를 김종필에게 소개 해서 

김종필의 처삼촌이 됐고 김종필은 박근혜대통령의 사촌 형부가 됐다. 


김종필은 하숙해 있던 집에 피난해 와 있던 육영수를 

박정희가 만나도록 주선했고 이들은 부부가 됐다. 하지만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은 딸이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육영수 어머니는 사주를 보고 와서 박정희를 사위로 삼겠다고 끝까지 욱여서 

혼인을 성사시켰다. 아버지 육종관은 자기 딸을 박정희에게 시집보낸 것 때문에 

부인과 의가상해 죽을 때까지 별거 했다. 


박정희는 추한 말씀 한마디도 안해, 정주영 증언


박정희가 18년 집권하는 동안 수수 십 명, 수수 백 명에게 

장관도 시켜주고 장성들에게 별도 달아 주었다. 

많은 사업가들에게도 돈 많이 벌기회도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청렴결백했다. 

희대의 사업가 정주영은 "나는 그 어른을 누구보다 많이 뵈었다. 

나는 그분을 아주 존중해요 단 한 번도 추한 말씀이 없었다."며 

잘 알지지않은 일화를 소개 했다.  

박대통령에게는 어릴 때 그를 등에 업고 다니며 돌 봐주던 

누님이 한분 있었다. 동생이 대통이 되었지만 아직도 

누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올케인 육영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박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생인 비서관에게 전달 됐다. 

비서관은 대통령 모르게 은행에 부탁해 영업택시 3대를 누님의 아들에게 

사도록 주선해 먹고 살게 했다. 박정희가 이를 알고 

친구이기도 한 비서관을 불러 대발노발하면서 파면시켰다. 

그리고 택시를 처분하게 하고 조카와 누님을 고향으로 내려 보냈다. 


조카는"삼촌 대한민국엔 거주와 이전(移轉)의 자유도 없습니까."라며 

울먹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누님에게 "누님 제가 대통령을 고만두면 

그 때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누님은 그 길로 대구에 내려가 우유 배달을 하며 살았다. 

박정희 보다 3살 아래였던 정주영은 박정희가 죽자 한 팔 꺾이었고 

김영삼과 대통령자리를 놓고 겨루다가 실패했다. 

말년에는 남북의 장벽을 뚫고 소떼를 몰고 오가며 김정일을 만나 평양에 

체육관(정주영 체육관)도 지어주고 개성공단 부지계약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관계에도 많은 공을 세우고 죽었다. 

1999년 김정일은 정주영에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한 덕택에 경제 발전의 기초가 된 점은 훌륭하다. 

서울은 도쿄보다 낳다고 자랑 할 만 한 세계적인 도시라며 서울에 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도 참배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주영이 살고 박정희도 살고 김정일도 살아 있다면 통일이 됐을까! 

통일하는 대통령이 역사에 기록될 명군이다.



박정희의 마지막일기. 김종필을 후계자로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죽기 10일 전인 

10월 17일에 마지막 일기를 썼다.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뿐"이라고 기록 해 놨다. 

박정희는 장차 김종필에게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기겠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박정희 집권 18년 6개 월 동안에 16년 넘게 박정희 곁에서 

한국경제를 일으키도록 참모장역할을 하면서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서울 출생, 박정희 기념사업회 회장)이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지금 제1야당인 더불어 민주당 전 비대 위원장이었으며 

비례대표 제1번으로 국회의원이 된 독일 경제학 박사 

김종인(호남)이 바로 김정렴의 사위다. 


박정희는 돈이 없어 돈 안내는 대구 사범을 나와 

국민학교(초등학교)교사 3년 근무를 마치고 만주(중국) 

신경에 있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유학 했다. 

이때 그는 부국강병책을 배웠다고 한다.  

군관학교졸업생중 1등에서 3등까지 일본 육사로 

유학을 하게 돼 있었는데 여기에 박정희가 포함 됐다. 박정희는 줄 곳 

1등을 뺏기지 않았던 수재(박근혜도 1등을 놓친적이 없다)였는데 

대구사범 졸업 할 때 왼 이유에서인지 꼴찌에서 두 찌었다. 


제9대 박정희 박대통령의 임기가 1984년 말로 끝이 나는데 

78년 7월 9대 대통령으로 선출 된 뒤 박정희는 김정렴과 

정무수석으로 있던 유혁인에게 임기 1년 남기고 대통령을 그만 두겠다며 

김종필을 총리시키고 내가 고만두면 (김종필이 대통령)권한대행 하다가 

김영삼과  김대중과 경쟁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면 된다고 했다. 

또 임기 전에 은퇴해서 나무도 심고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며 

서울과 오산 구간에 구릉지(丘陵地)도 물색했다. 

내가 지금 땅을 사면 말이 많을 테니까 정주영보고 사라고 해서 

내가 고만 둔 후 사면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聖君 일등 타이 세종과 박정희 


한국 역사상 나라의 물줄기를 

돌려 논 중대사를 결정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100년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국운이 걸린 결정을 해야 할 기로(岐路)에 있을 때가 많았다. 

역사학교수, 역사소설작가, 역사연구원, 재야 역사학자 101명이 모여서 

“한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들” 108가지를 선정하고 이 사건들의 

중요도(重要度)의 순서를 매겼다. 


108가지 중 중대 사건을 제일 많이 결정한 사람은 세종과 박정희다. 

세종은 한글 창제, 대마도 정벌, 6 진을 개척, 갑인자(甲寅字)주조 인쇄술 개발, 

데릴사위 제도를 바꿔서 신부를 신랑 집으로 와 살 게 한 것(숙신옹주친영), 

공법개혁 등 6개의 중대한 결정을 했다. 

박정희는 5.16 혁명, 고속도로 건설, 경부고속 2 년 만에 개통, 

월남 파병, 한일회담, 한글전용, 10월 유신 등 6가지 중대 결정을 해 

세종과 일등 타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백성을 먼저 걱정한 것과 재위기간이 길다는 것과 

好 Girl(호걸) 이었다는 점이다. 

세종은 재위 31년 6개월 동안 기록에 있는 부인만 6명이고 

자식이 22명이나 되었다. 박정희는 왕조시대 임금도 아닌데 

헌법을 바꾸면서 18년 동안 장기 집권했다. 

국사로 바쁜 중에도 상처 후 부쩍 술자리가 자자졌고 

결국은 일생을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마감했다. 


첫째 정실부인은 존재도 없이 여승으로 살다 죽었다. 

6.25 전쟁 통에 피난민들은 죽네 산에 하는 중에도 박통은 서울에서 

한 젊은 대학생과 동거했고 

재임 중 영부인은 8.15 광복 행사장에서 유명을 달리 했다. 

육사 출신 고급장교(박선호)가 김재규 정보부장 밑에서 

“죽어도 하기 싫었다”는 박정희 채홍사 역할을 했다. 

그는 김재규와 함께 사형 당했다. 박정희는 안가가 생기기 전에는 

경호원 한사람만 대동하고 위장 차번호 판을 달고 단독행사도 자주했다. 


국사를 마치고 박정희와 정일권은 술마시며 홀아비 타령도 했다. 

하루는 박정희가 “형님 장가 드셔야지요” 했다

(정일권은 박정희의 신경 군관학교 2년 선배). 

정일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모 대학의 음악 선생과 연애하고 있는데 

장인짜리가 반대해서 성사가 안 된다”고 했다. 

장인 될 사람은 일류 S대학 공대 나온 엔지니어고 잘 사는 집안이라고 했다. 

박정희는 그 장인 깜에게 “따님을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출가시켜 달라고” 

일필휘지 간곡한 편지를 썼다. 장인은 혼인을 허락했고 정일권은 이렇게 해서 

서울의 한 대학 음악교수의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신방을 꾸몄다. 


다음 중대 결정을 한 사람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이방원, 세종 아버지)이다. 태종은 부인 12명에 자녀는 29명이다. 

왕자란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임금이 되어서도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 처갓집 처남들까지 정적을 무수히 죽였다. 

세자 양녕대군을 폐하고 셋째 세종을 택해 보위를 승계 했으며

(세종이 성군 재목임을 미리 본 것) 중단된 실록을 다시 편찬하게 했다. 

선조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편찬토록 해서 중국 일본 등 동양에 

수수 백종의 한의서를 허준의 동의보감 한권으로 통일하게 했고 

감옥에 있는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임명해서 임진왜란을 

우리의 승리로 이끌 게 한 것, 세환사(포로석방을 위한 사신) 파견, 

여진족과의 외교단절 등이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한미동맹 체결이다. 

이성계는 조선 개국, 한양천도, 

정도전을 만나 조선을 공맹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었다.  

왕건의 삼국 통일, 고려 광종이 과거제를 도입해 오늘의 고시제도가 된 것, 

광해군의 후금실리외교,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경복궁 중건 등이 

역사적인 중대한 결정 들이다. 


(이글은 www.seoulvoice.com 과 www.cafe.daum.net/mkchicago 문경문학회란에도 있습니다)  

<한국민속 연구원 제 507호 20161124 charak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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