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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ㅈ에 불났다

2014.02.15 14:35

남송 조회 수:1267

이용익 대감  O에 불났다.                    


쇠고기 문제로 100 만 명이 동시에 촛불시위를 했다. 

순수했던 촛불 시위는 어느새 정치화했다.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100 만 명이 순수 할 수는 없다. 


성직자 100명이 모여도 하나같이 똑 같을 수가 없다. 

시위자 중에는 반 골 기질 자, 사감이 있는 자, 

MB를 싫어하는 자, 반대를 즐기는 자도 있다. 


조갑제(전 월간조선)는 촛불 든 시위자 중에는 범법자도 있고 

좌파사상을 가진 자도 있고 전과자도 있다면서 

대통령은 이들에게 굽혀서는 안되고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라고 주장했다. 


오늘은 광우병 쇠고기, 내일은 공영방송 지키기, 

모래는 대 운하반대, 

다음은 공기업 민영화 반대, 다음은 미친 교육 반대 등 온 통 촛불세상이 됐다. 

광우병 쇠고기 먹지 않겠다는 

순수한 건강 지키기 시위에서 많이 변질되었다. 정치적으로 오염 됐다. 

올바른 민 의를 알리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평화 시위다. 


그 이상 나가면 나라가 불안해 진다. 

대통령 최 측근에 청와대 수석으로 있을 때 추 부길(목사)은 

시위자를 사탄이라고 기도를 해서 시위대의 염장을 질렀다. 


                   사제단은 광장에서 시국미사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김 진홍(목사)은 광우병 국민 대책 회의(1천 8백 60명?)를

                       검찰에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불교는 종교차별하지 말라고 들고일어났다. 신교도 구국기도회를 했다. 


종교인들이 촛불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종교인들은 타협을 안 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탄과 타협하는 것은 자기도 사탄이 되기 때문이다. 


시국미사에서도, 구국기도에서도 법회에서도 아전 인수격으로 제 각각 

자기에 맞는 성구를 들고 나와 

자기도취에 빠져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성구를 정치 판에 들고 나와 분쟁하는 것은 삼가 해야 한다. 

정치를 자기가 좋아하는 

성구로 해결하려는 것은 100년 종교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성구대로만 하면 세상에 안 될 것이 없다. 만사가 평화스럽다. 

하지만 종교인들이 촛불을 들고 세상에 나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종교도 오염시키고 

세상이 혼란에 빠지고 암흑시대로 접어드는 첫 문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도로 남이 되고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면 도로 님이 되는 

장난 같은 세상’이라는 노래가 있다. 

촛불에 점하나 지우면 O불이 되고 점하나 다시 

찍으면 도로 촛불이 되고 밭 침 하나 잘못 쓰면 다시 O(ㅈ)불이 되는 요상한 세상이 된다. 

뒤돌아 볼 새도 없이 급하게 도망 나왔을 때 O(ㅈ)불나게 뛰었다고 말한다. 


함경도 명 천에 이 용익이라는 기골이 장대하고 걸음 빠른 사람이 있었는데 가난해서 

가마 꾼, 광부, 소금장사(보부상)를 하면서 살았지만 이재에 아주 능했다. 


17세에 가출했기 때문에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기록이 없다. 

임오군란으로 민씨 일가가 풍비 박산 되었을 때 민비는 친정 장호원으로 피란 했고 

민 영익은 상투를 자르고 서울에 숨어 있으면서 서울 소식을 민비에게 알려 주었다. 


이용익은 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비밀을 연통 해주는 심부름꾼이 됐다. 

왕복 3 백 리 길을 하루에 비호처럼 왕복했다. 


그야 말로 오 즘 누고 O볼 새도 없이 O불나게 뛰어 

다닌 덕으로 민비의 눈에 들어 29세에 단 천 부사가 되었고 

부사로 있으면서 금광을 일으켜

적자에 허덕이던 왕실 재정을 도왔다. 


함경남도 병마 절도사, 한성부윤(서울시장), 중추원 일등의관, 

나라재정을 총괄하는 탁지부 국장으로 광산을 국유화해서 

재정을 튼튼히 했고 일본사람들이 잡고 있던 알 짜 백이 도자기 업, 

인삼 업도 국유화해서 일본사람들의 눈에 가시가 됐다. 

재정을 총괄하는 내장원경 대신 까지 했다. 실세중의 실세였다. 


알람미를 무역해서 빈민구제도 했다. 

일본은 조선의 대신 이용익을 제거해야 고종을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일 국의 대신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해 1년이나 감금해 놓고 

한일 의정서(1904년 2월 23일)를 체결했다. 


이 용익은 일본에서 교육의 중요함을 깨닫고 서울에 돌아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고종에게 부탁해 보성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서울에는 한성병원(일본), 

알렌이 세운 세브란스(미국병원), 

러시아 대사관 병원(소련 병원)이 있었다. 


마침 이 용익 대감은 급성 중이염으로 골이 빠개지게 아팠지만 

일본 병원에 가면 친일, 미국 병원에 가면 친미, 러시아 병원에 가면 친로파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워 

어느 병원에도 가지 않고 집에서 곪아터질 때까지 고생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처신하기 어려웠으면 그랬을까. 


일본 미국 소련 청 국 등 강대국 세력 다툼으로 나라가 편한 날이 없었다. 

조선의 대감이 골이 빠개지도록 아파도 병원에도 못 

갈 정도였으니 그 세력다툼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고종은 이용익의 도움을 받아 대한제국을 중립국으로 만방에 선언(1904년 1월 21일)하기에 이르렀고 

독일 프랑스 영국은 이를 승인했다. 


이로 인해 이용익은 일 본으로부터 신변에 위험을 받고 군부대신에서 물러나 고종이 

하사하는 금괴를 여비로 러시아로 망명했지만 밀정(3명)에게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불라디보스토그까지 와서 유학생 김현토의 단도에 찔려 죽었다. 


이용익은 죽기 전에 이곳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등을 

고종에 천거해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토록 했다. 

이준은 만국회의에서 배를 갈라 한국의 형편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열사가 됐다. 


우리 나라는 골이 빠개지도록 아파도 미국병원에도 중국병원에도 일본병원에도 

맘 편히 갈 수 없는 형편이다. 


어설픈 외교로는 힘들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