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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공산당원? 

대통령은 무능해도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무능해선 안 돼. 

탄핵 피할 기회 차버린 국회가 무능. 

 


탄핵을 피할 수 있는 길 박차버린 국회. 협상이 없는 국회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는 1년 남았고 

탄핵이 되던 안 되던 어차피 2017년은 대선 정국이다. 

대통령이 무능했다 해도 그 동안을 못 참고 대통령을 탄핵했다. 


최순실 사건이 터지고 민심이 동요하자 대통령은 3번에 걸쳐 

대 국민 담화를 했다. 

대통령은 국회를 찾아가 국무총리를 추천해 달라고 기회를 주었지만 

국회의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여당이 4월 퇴진 6월대선 타협안을 제기 했지만 야당은 

이마져도 거절하고 탄핵을 고집했다. 


그리고 非朴들의 동조(반란표)가 탄핵결의에 결정타가 됐다.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됐고 대한민국은 대통령 없는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이 제의한 국무총리를 야당이 추천 했으면 

지금은 야당 총리가 대통령 대행으로 국정을 맡았을 것이며 

대선가도도 야당총리가 우지좌지 할 수 기회가 됐다. 

야당은 이런 호기(好期)를 다 차버렸다. 뿐 아니라 

4월 자진 하야 6월 대선으로 타협이 됐다면 

지금과 같은 국정 공백은 피해갈수도 있었다. 


그리고 새 대통령도 7월에 나올 것이었다. 결국 탄핵이 결정돼도 

이보다 더 빠르게 대선을 치르게 될지는 의문이다. 

결국 야당은 탄핵으로 대선을 앞당기려 서둘렀지만 

시간적으로 아무 소득이 없게 됐다. 

야당은 국민을 위해 타협을 하지 않는 국회로 만들었고 

국정 공백을 더 장기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 대통령 탄핵 비민주적. 미국언론 voa의 분석.


미국언론은 박근혜 탄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비민주적이라는 평가다. 

미국의 소리 방송voa은 온 세계를 상대로 하는 공보방송으로 

북한에 대한 뉴스도 많이 보도하고 있다. 

지난 1월 5일 한국의 “뒤죽박죽된 탄핵 절차 이해하기”라는 

제목의 칼럼이 나왔다.

 Understanding South Korea’s Upside Down Impeachment(브라운 패든 기자). 

왜 세월호 사건을 거론하는가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출처 조선일보). 


인민재판과 다르지 않아


한마디로 말하면 먼저 탄핵을 해놓고 후에 의혹을 제기 해 

그것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식의 박근혜 탄핵이 사또재판(중요한 것 하나만 선별해 판결),

인민재판 아니냐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뭐가 급해서 대한민국(국회)은 충분한 근거도 (확보하지)않은 채 

덜컥 박근혜 탄핵부터 결정했을까. 


선량한 국민들 뒤에서 움직이는 어떤 세력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박근혜대통령의 무능은 두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무능하다고 탄핵을 한다면 이는 옳은 결정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바람을 잡더니 

그것이 밝혀지지 않자 백옥주사 등을 청와대 관저에서 맞았다고 했다. 

그래서 주치의와 간호장교 등을 불러 청문회를 해도 별로 밝혀지는 것이 없자

“야메”로 주사를 놔주는 백실장이라는 아주머니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말썽 많은 jtbc가 입수했다는 최순실 태블릿pc도 증거채택에 실패). 


시작은 장대했지만 용두사미


시작은 거대했는데 그 끝은 참으로 빈약하다. 

태산이 떠나 갈 듯이 떠들었는데 나타난 것은 쥐 한 마리 꼴이다. 


그리고 (뒤늦게)지금에 와서 세월호 침몰과 박대통령을 접목시키려고 한다. 

세월호가 침몰해 많은 학생이 숨진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날 박대통령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 것은 백번 천 번 비판해야한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인신공양(?) 이야기(로)가 아직도 떠들고 있다. 


세월호 사건 당일 박대통령의 행적을 조사해야한다는 주장은 

세월호 특검을 주장할 때부터 나온 것인데 그때는 실현 되지 못하다가 

최순실 사건이 일어나자 현실화 되었다. 

대통령 리더십을 훼손(무능을 증거)하려는 의도를 갖인 주장인데 

지금 촛불 시위는 특검이 이 부분을 수사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 시위 목적이 왜 최순실 사건과 무관한 세월호 사건을 합쳐 엮느냐). 

그러하니 지금의 탄핵 사태는 누군가가 일사분란하게

(세월호 사건 때부터) 조정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 


대통령이 무능하다고 대한민국 민주주의도 무능해선 안 돼


대통령은 무능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무능하다고 (대한민국의)민주주의마저 무능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선량한 국민들이 법치를 무시하고 이렇게 밀어붙이는 데 

참여하게 된 것은 왜 그럴까. 촛불시위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광화문 광장에 나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데 대해서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봐야한다. 

진짜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미국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민주주의 의식이 어떤 수준인지를)


박정희 형 박상희도 공산당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 박상희(朴相熙)는 

제정 때 민족지(조선일보 등)신문 기자와 지국장도 한 

대구에서 잘 알려진 유지다. 해방 후에는 남로당 원이 됐다. 

대구 10월 폭동은 해방 후 빨갱이 폭동 제1호이며 

대구폭동은 여수반란과 제주도 폭동의 기폭제가 됐다. 

그 후 대구는 야당도시로 전통을 이어가다 박정희가 

5.16 혁명에 성공하자 여당 도시가 됐고 해방 후 70년이 흐르는 동안 

11명의 대통령 중 7명의 영남 대통령이 나와 50년을 한국을 다스렸다. 

종래에는 신라말 이후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까지 영남 대구에서 나왔다.  


공산당원 박정희 옥중 자술서 


6·25전쟁 직전인 1949년 숙군 수사를 총괄하고 있던 것은 

육군 본부정보국, 특무과장 김안일 (金安一 )소령이었으며 

박정희 수사 책임자였다.

박정희는 당시 수사팀 장이었던 김창룡 정보주임(소령)에게 

자술서를 써냈고 이 보고를 받은 사람은 육본정보국 김안일소령이었다. 

박정희와는 사관학교 2기 동기였다(조갑제는 김안일과 최후 인터뷰). 


김안일(후에 장군)은 박정희 소령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남로당 조직 명단을 털어놓는 등 수사에 협조한 데다 

그의 자세가 의연하여 수사관들을 감복시켰기 때문이라며 

백선엽, 김창룡, 그리고 저(김안일), 셋이 연대보증을 서고 

석방시켰다고 증언(1989년 12월)했다. 

김안일에 따르면, 김창룡이 박정희 구명사유서를 겸한 신원 보증서를 작성해 

자신과 함께 백선엽 정보국장에게 갔다. 

백선엽 국장은 너희도 여기에 도장 찍어라고 하여 

세 사람이 박정희의 신원보증인이 됐다. 


박정희의 허위진술. 김안일 증언 


김안일 소령은 박정희의 수사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김창룡한테 들었는데)박정희 소령은 구속되자마자 

이런 때가 올 줄 알았다면서 자술서를 쭉 써내려갔다고 한다. 


내용인즉 대구 폭동에 가담했다가 피살된 

형 박상희(朴相熙)의 집을 찾아갔더니 

이재복(李在福·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이가 유족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이재복은 공산당선언 같은 책자를 가져다주면서 남로당에 가입하라고 꾀었고, 

형의 원수를 갚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술서를 읽어보니 박 소령은 이념적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이런 인간관계에 얽혀서, 또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들어간 

감상적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정희가 ‘남로당 세포’라고 털어놓은 사람들 가운데 억울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박정희가)허위진술을 한 것이다. 

허위로 진술하는 바람에(어굴하게 잡혀 고생 당한 시람들도 있다). 

김창룡이 박정희를 마음대로 풀어줄 수는 없었다. 절차를 밟아야 했다. 

김안일은 동기생 박정희를 조선호텔 특무과 사무실로 불러 직접 신문했다. 

그리고 김안일 내가 백선엽 국장에게 살려주자는 제의를 했다. 

자기 조직(공산당원 명단)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박정희)는 

풀어주어도 안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백선엽 국장은 김안일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정희 소령을 면담하기로 했다. 

김안일이 수갑을 찬 박정희를 데리고 정보국장실로 들어와서 

백 국장 옆에 앉았다. 백선엽은 석 달 전 여순 14연대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참모장일 때 박정희 소령을 작전장교로 데리고 있었다. 

마주 앉은 옛 부하 박정희의 모습은 처연했다. 

생사(生死)의 기로(岐路)에 선 한 연약한 인간이 삶을 애원하는 순수한 모습, 

그것이 백선엽을 움직였다. 

“저를 한번 도와주십시오”라는 박정희의 애원에 백선엽은 무심코

 “도와드리지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20분간의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백선엽은 그분이 살아난 것은 간단합니다. 

저 앞에 앉아 있던 그분(박정희)의 모습, 

거기에 저의 마음이 움직인 겁니다“라고 했다(신문 연재에서). 


박정희는 왜 5.16 혁명을 했나. (세상은 불만자의 것1) 


궁지에 쫓긴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이 있다. 

김안일 장군은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를 한 데는 

그의 사상에 대한 미군의 의심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믿고 있다. 

1960년 4·19 의거 뒤의 민주당 정권 시절 박정희 소장은 

최경록(崔慶錄) 육군참모총장 밑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있었다. 

박 소장 바로 밑에서 차장으로 있었던 사람이 김안일 준장이었다

“그때 미 8군은 박 소장을 한국 군부에서 제거하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가끔 미군에서 기습적으로 작전참모부서에 들이닥쳐 한국방어계획 등 

기밀서류의 보관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무슨 약점을 잡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박정희 소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문제는 김형(김안일)이 나서서 설명해 줄 수밖에 없겠습니다. 

박 장군을 조사한 사람이 그런 말을 미 8군에 가서 해야 잘 먹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통역을 데려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박 소장은 2군 부사령관으로 전보돼 대구로 내려갔고, 

거기서 5·16 계획을 세웠습니다. 

박 소장은 쫓기는 심정으로 군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거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김안일 장군은 숙군 수사 없이 6·25를 맞았더라면 

한국군은 내부 반란으로 조기에 붕괴했을 것” 이라고 했다. 

金安一은 평양신학교 교수


김안일은 1917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했고 

1936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다가 

육사 2기로 군에 들어왔다. 육군정보국 특무과장으로 근무하던 김안일은 

숙군 작업을 마무리하고 김종오(金鍾五) 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의 작전참모 겸 정보참모로 6·25전쟁을 맞았다. 


김안일은 박정희의 혁명정부 참여 제의를 거절하고

5·16 이후 20사단장, 1963년 8월 16일 

육본전투교육사령부 부사령관을 끝으로 군문을 나섰다. 


군에서 나온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평양신학교는 1901년 미국인 선교사 

새뮤얼 모펫(Samuel A Moffet)이 설립한 학교로 

한국장로교회의 첫 신학교였다. 

평양신학교는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수난을 당하다 

남한에 내려온 목사들이 1975년 서울에 평양신학교를 재건했다. 


항명 파동과 강제 예편. 김종필 (세상은 불만자의 것 그 2)


김종필 소령은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해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것이 8년 정도 늦었던 그의 동기들은 

군 운영체계에 불만을 품게 됐다. 

육군 본부 정보처장이 되고,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성당에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整軍)을 요구했다. 

이는 후에 그가 항명(抗命)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됐고 

김종필과 석정선은 예편 됐다. 

이후 별다른 직업이 없던 그는 정계 입문을 결심한다. 

1961년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4월 19일 당일은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조용했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종필은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정변을 준비 해 오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현역 육군 중령으로 복귀했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중앙정보부를 신설하고 

그는 제1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5.16 군사 정변은 

낡은 구세대의 정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거사라고 발표한다. 

군사 정변 직후 김종필은 장인 박상희(박정희 형)의 경력과 관련하여 

사상 공세에 시달렸다.  황태성은 대구 월북해 부상까지 했고   

박정희 형 박상희의 친구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를 만나러 

김일성의 특명을 받고 남하해 간첩으로 사형당했다.



(이글은 www.seoulvoice.com과 www.cafe.daum.net/mkchicago 시카고 문경문학회 난에도 있음)

<한국민속 연구원 20170112 제513호 charakwoo@hotma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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