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03 14:53
한반도 통일은 어떤 모델.
남노당 박헌영 아들이 한국 불교에서 제일 높은 대종사 원경스님
남노당 고정간첩 박헌영은 충남 예산 사람
한반도가 어떤 모델로 통일이 될것인가
또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통일이 될것인가 통일이 되기는 될 것인가?
해방 후 70년 동안 3연간은 전쟁을 치렀고 그 후에는
온 국고(國庫)를 쏟아부으며 무기를 구입하는 등
전쟁의 무한 경쟁 속에서 온 민족은 인고의 날을 보내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 왕조 3 대 세습을 거듭하며 정적들을 무참히 숙청하고 있다.
충남 예산사람으로 남노 당을 창당한 박헌영은 월북(1948)해
김일성 밑에서 부상(副相)겸 외상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6.15 전쟁이 끝나자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 국적자인 현앨리스(현미옥)와 미제의 고정 간첩이라며 숙청했다.
박헌영(1900-1956)은 김일성에게 전쟁만 일어나면
남한 인구의 3/4(?)인 남노당원들이 총궐기 할것이라며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사소했다.
하지만 전쟁에 실패하자
김일성은 박헌영을 필두로 월북한 남로당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김정일 때도 숙청은 계속 되었고 김정은도 친중(親中)파이며
최측근 후원자이고 고모부인 장성택까지 숙청하면서 철권 독재를 이어가고 있다.
박헌영과 같이 사형당한 현미옥(1903-1956)은 독립운동가이며 공산주의자였던
목사 현순(1880-1958)의 딸이다.
고종황제가 하와이 이민을 허락하자
121명이 1903년에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이 때 통역관이 현순 목사였고 현미옥의 어머니는
임신 중에 남편을 따라 하와이에 도착하자 딸 미옥을 생산했다.
그리고 현순 현목사가 한국에 귀국해 있다가
31운동 바로직전에 독립운동차 상해로 갔을 때 미옥도 가족과 함께 상해로 갔고
거기서 독립운동을하고 있던 박헌영을 처음으로 잠깐 만났다.
박헌영은 주세죽과 막 결혼한 신혼 때였다.
박헌영은 네 번 결혼을 했는데 두 번째 부인으로부터 얻은 아들하나가 남한에 있다.
그가 원경스님이고 한국 불교계 법계(法階, 불교계 계급)로는 최고로 높은 대종사다.
그는 러시아에 있는 이복 자매도 만나 봤다며 아버지에 대한 책을 집필중이라고 했다.
해방이 되자 박헌영은 서울에서 여운형과 왕래하며 공산당 운동을 했다.
그때 현미옥은 미국국적을 갖고 주한 미 24군단 정보참모부 대령 대우를 받으며
군속으로 통신검열단 부책임자로 서울에 있었는데 그때 박헌영과
상해에서 혜어진후 또 마나게 됐고 이일로 현미옥은
주한미군 첩보부로부터 감시를 당하다 하와이로 추방됐다.
그리고 현미옥은 박헌영이 북의 부상으로 있을 때 남동생 현 피터가 의사로 있던
체코스로바키아에 머무르면서 월북하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박헌영은 현미옥을 평양에 오게 주선했으며 자기 수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김일성은 박헌영과 현미옥은 첫애인이고
미제의 고정간첩이라며 두사람을 함께 숙청했다.
지금에와서 밝혀진 것으로는 이들은 애인사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흡수통일과 공존 통일
북한에서 3대 세습을 하는 동안
남한에서는 11번이나 대통령이 바뀌었고
4.19 학생혁명, 5.16 군사혁명, 12,12 군사쿠데타, 6, 29 선언 등 정치파동이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치자들은 반공과 통일을 부르짖었고
한반도 분단과 통일은 정치적으로 애물단지가 됐다.
그 동안 통일에대한 많은 통일연구소와 많은 논문과 책이 발간 됐고
각 대학에는 북한학과가 개설 됐으며 수수 많은 세미나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지만
통일은 국민들 앞에 무덤덤하기만 하고 통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답답함만 가중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북한은 오래 못 간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오래갈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곧 망할 것이므로 통일준비를 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정부가 북한이 제 스스로 붕괴 될 때를 마냥 기다리고 만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 만큼 통일문제에 대해 복지부동이다
(이명박정부 때도 북한은 곧 망할 거라고 말한 고위 정부관계자가 있었다).
지난 5월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와 한국 정치협회가 공동 주최한
“한반도 통일모델”이라는 제목의 강연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한국의 통일을
“독일식모델”과, 대만과 중국의 “양안(兩岸) 모델”과
비교하는 얘기가 나왔다.
독일식 모델에 대해서는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 대학원 원장인 염돈재교수가 말했다.
염돈재교수는 공무원 채용에서 1등으로 합격했고 노무현 정부 때는 국가정보원 제1차장까지 했다.
1980년대 초에는 시카고 영사관에서 3년간 근무했으며
1990년부터 3년간은 독일에서 독일통일을 직접 목도(目睹) 하는 등
연구를 많이 했으며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이란 책을 출판했다.
책내용은 매우 자세하고 충실하다.
이 책의 추천 문을 시카고 전 한인회장 김창범씨가 썼다.
염돈재 교수는 독일 통일은 동서독 간에
“힘의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격차가 통일의 불가피성이었다”고 강조했다.
(우위에 있는)서독이 통일을 주도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통일이 이루어졌고
통일부담도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만일 동서독이 대등한 입장에서 체제가 합처졌다면 이는 통일이 아니라
두나라가 "혼합"한 것으로 혼란만 가중 됐을 것이고 실익도 없었을 것이라며
통일 준비가 길어지면 후유증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커진다고 했다.
(대등한 입장에서 하는 통일을 통일로 표현하지 않고 혼합(混合)이라 했다).
하반도에서도 남 북격차가 통일하는데 불가피한 요소이며
남한이 우위에 있어야 남한 주도의 통일이 가능하고
통일비용도 남한이 주도해야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남과 북이 대등한 상태에서 혼합(통일)되면
큰 혼란(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북한 주민과 동독 주민의 차이점
그는 또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동독주민이 서독TV 시청과 외부정보를 다양하게 접할 수 있어서
동독주민들에게는 자발적으로 서독에 대한 동경심이 우러나왔기 때문이라며
동독과 북한과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북한은 1) 동독처럼 개방되지 않았고
2) 남북 간 적대감이 여전하고
3) 북한 주민에게는 외부소통의 통로가 단절 돼 있고
4) 강압적인 억압체제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 휴대폰과 인터넷 사용과 장마당 확대와 한류풍과
한국산 제품이 널리 유통되는 것 등은 긍정적이라고 했다.
그는 또 서독에서처럼 북한 위정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며
“우리가 맏형 자세”로 북한을 포용하고 북한의 안정과 발전을 도우면
혹시라도 통일이 될 것이란 희망은 “이상주의”라며
이런 이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했다.
문흥호 한양 대 국제대학원 원장은
중국본토와 대만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양안(兩岸)에서 현재 하고 있는 것처럼
(남과 북도) 정치와 안보를 분리해 민간교류를 확대하면
서로가 윈 윈 게임이 된다며 정치적 사안, 정부와 민간 차원의 철저한 구분을 통해
상호 다른 체제의 차이를 좁혀나가는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치, 안보 이슈와 무관하게 경제협력과 사회문화적 교류를 꾸준히 확대하다보면
통일의 공감대가 형성된다고 중국과 대만의 양안(兩岸) 모델을 제시했다.
위에서 말한 독일식 통일(흡수통일)과, 중국과 대만의 양안식 통일모델과
좀 다른 개념인 공존(共存)통일, 일명 공조(共助)통일 모델도 있다.
흡수통일은 남한이 제일 바라는 모델이다.
남한 정치계에서는 흡수통일이라는 말은 금기시 돼 있다.
북한은 흡수통일이란 말만 나오면 또 흡수와 비슷한 말만비쳐도 팔팔 뛰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통일준비위원회 정종욱 부위원장이 통준위 안에
“통일 준비 전략 팀”이 있다고 했을 때도
북한은 통일준비위원회를 당장 없애지 않으면 남한 괴뢰 패당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흡수통일은
북한 내에서 루마니아에서처럼 민중 폭력 혁명이나
독일에서처럼 주민들의 봉기가 있어야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남과 북이 타협하는 단계를 거쳐서 연착륙하는 통일을 희망하고 있다.
그래서 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걸게 됐다.
공존(共存)통일 이라는 것은 남북격차가 없이 경제적으로 대등한 때
대등한 입장에서 합치자는 것으로 위에서 염돈재 원장이 언급한 대등(對等)한 입장에서
혼합(통일) 하자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북한에 등장한 신흥부자, 통일 방해꾼
북한은 지금 시장 경제를 자유화해서 신흥 둔주들이 많이 등장했으며
시장경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또 정치적으로도 김정은의 권력 주위에는
신흥 젊은 정치 엘리트들이 소수이긴 해도
앞날을 기대하며 정치권에 잠재해 있다.
북의 이 신흥부자들과 정치 엘리트들은 통일이 돼서
남한의 재벌들이 북한으로 큰 자본을 쏟아부으며 밀고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통일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현상유지이고
통일은 북한 신흥 부자들의 경제적 자살이고
정치 엘리트들의 정치적 자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통일 방해꾼으로 등장했다.
이제는 우리에게 유리한 흡수통일은 점점어려워져가고
대등한 입장에서 혼란이 예상되는
공존통일이나 혼합통일 모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북한의 신흥부자와 정치엘리트를 제외한
북한 사회 서열 맨 밑바닥에 있는 서민들만이 북한의 변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통일을 기대하는 유일한 잠재 세력이 됐다.
정부는 이들을 자극해 북한 특권층과 분리시키는 구상을 세우고
실천해야하는 데 이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동독주민이 서독을 동경했던 것처럼
남한을 동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남한 정부가 밑바닥에 있는 그들에게
하루아침에 남한 사람들처럼 자유를 갖게 하고
물질적인 궁핍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 복지를 누릴 수 있게 한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면 그들이 독일에서처럼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대학 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동아일보 칼럼 4/23/15 참조).
대북 통일정책 복지부동
이런 일에 정부가 적극적이지 않다는 불만 속에서
우리만이라도 앞장서 그런 일을 해야겠다고 북쪽으로 바람이 불때를 기다렸다
풍선에 삐라를 달아 북으로 보내는 탈북 민들이 주도가 된 민간단체가 생겨났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성공률도 낮은 삐라 날리기에
없는 돈을 모아 힘을 다할까!
북한의 제 2인자 황병서와 최용해 등이 지난해 가을
인천 체육대회 폐막식에 참가하면서 남한에서는
박근혜대통령만 제외한 국무총리 당대표 등이 그 들에게 점심을 사주며
동네 어른들이 만나는 것처럼 아무 의제도 없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것을 보고서
이제는 무엇인가 되겠지 기대를 했었다.
남북 최고 우두머리들이 이처럼 모인 때는 과거 70년동안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북으로 돌아가자마자 삐라 날리는 것을
정부가 중지시키지 않으면 남북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북한 사회 맨 바닥에 있는 주민이 통일주역
그 만큼 북한 주민들은 외부와 소통이 두절 돼있고
북한 당국은 북한 주민들의 외부소통에 그만큼 신경과민이 돼있다.
그만큼 북한 당국자들은 주민들의 외부소통에 찔리는 곳이 있다는 증거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는 정부가 앞장서
북한 주민에게 외부와의 소통의문을 열어제치는 대북정책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개인이 할수 없으며 오직 나라만이 할 수 있는 국가지대사다.
탈북자들(2만 8천명)의 약 52%가 북에 두고 온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고
확인하는 전화까지 한다는데 이런 것을 잘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고
남에 와 있는 탈북민들을 차별하지 말고 잘 살도록 도와주고 인정을 베풀면서
그들을 통해 남한을 북에 알리는 것도 대북정책의 한 방도 일 것이다.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역은
바로 북한주민들의 봉기다. 박대통령도 통일은 북한 주민에 달려 있다고 수차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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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 연구원 문경 제432호, charakw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