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31 15:55
연개소문의 연인은 일본 여왕 ?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을 때 백제 무왕의 아들 “교기”가 일본으로 망명해 천지왕(661-671)이 되었다. 나당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고구려도 멸망 시켰는데 이 때 연개소문도 일본으로 망명해 천지왕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했는데 이가 일본의 천무왕(673-686)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도래해 왕이 된 천무왕을 액전이라는 일본여왕이 좋아하게 되었고 이가 연개소문에 대해 쓴 시(658)가 만엽집에 실려있다. 고대 우리 나라 향가형식의 시 3천5백16수가 수록되어 있는 이 만엽집 萬葉集은 일본의 고대 문학이며 역사적 고전이다. "일본서기"의 664년 편의 기록에 연개소문 대한 이야기와 그의 세 아들 남생 남건 남산에게 연개소문이 남긴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 형제들은 벼슬을 놓고 싸우지 말아라 싸우면 이웃나라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물고기와 물처럼 잘 화합하라”고 부탁한 유언이다. “일본서기”는 천무왕이 그의 아들을 시켜서 7세기에 쓰여진 역사고전인데 이 책을 연구한 일본의 역사사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에는 연개소문이 일본으로 망명해서(664년 10월에) 백제 계의 천지왕을 죽이고 천무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고대 사학자인 고바야시 야스고와 일본 잡지 문예춘추). 연개소문은 666년에 죽은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 망명하여 고구려 사람들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이 부분은 연구해 볼만한 대목이다.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대대로” 라는 벼슬을 했는데 연개소문은 이 벼슬을 이어 받아 15 세에 “대대로”가 되었고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을 쌓는 등 고구려를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성격이 거만하고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성격이 난폭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고 미움을 받았다. 연회장에서 영류왕과 조정 중신들을 100 명씩이나 한꺼번에 죽이고 새 임금으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이 된 보장 왕을 보좌에 안치고 스스로 대막리지(지금의 국무총리)란 임금 다음 가는 벼슬자리에 올라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자가 되었다. 일본여왕 액전은 고구려에서 온 천무왕을 사랑하며 시도 쓰고 글도 썼다니 한류문화가 일본에서는 이 때부터 이미 싹 터 일본사람들의 피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만엽집에 있는 시는 신라의 이두 식 향가로 한국 사투리가 암호처럼 섞여있어 일본말로 쓰여 있긴 해도 일본 언어학자들도 뜻을 아직까지도 해석을 못하고 있다. 이것도 우리 한국의 고대어 학자들이 연구 해 볼만한 과제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대막리지 연개소문에 대한 연속극이 한 때 인기를 끌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8번이나 침공했으나 한번도 이기지를 못해 절치부심 고구려를 무노트릴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마침 연개소문이 와병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8전8패를 설욕하고자 655년에 9차 침입을 했지만 24세의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소정방을 살수에서 무찌르니 9차 침입도 실패하고 말았다. 남생은 살수에서 당을 물리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어 권력과 병 권을 쥐고 고구려를 호령하기 시작했다. 658년 연개소문이 죽자 당나라는 연개소문 없는 고구려에 10 번째 침입했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659년에 11번째, 661년에는 76세의 노장 소정방이 다시 27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12번째, 662년 정월에 13번 째 침입했으나 살수에서 또 패하고 말았다. 이 지루한 전쟁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잘 싸웠던 고구려 군사들은 북에서 들어오는 당 군과 남쪽에서 들어오는 나당 연합군으로 남과 북으로 군대를 나뉘어 싸워야 했음으로 군력이 남북으로 분산되었다. 이로 인해 당나라는 대동강이북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지 않고 고구려군사가 끝까지 선전해 잘 싸워서 고구려가 이때 멸망하지 않았다면 중원은 우리 땅이 되었을 것이고 오늘의 중국 땅도 대부분 대한 민국 땅이 되었을 것이며 지금 중국의 몇몇 역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동북공정”이란 중국의 역사 왜곡 주장도 없을 것이다. 남생의 동생 남건과 남산은 이 틈에 반란을 일으켜 형 남생을 없애려함에 동생들에게 쫓겨 남생은 안시성으로 들어가 당에 투항하면서 남건과 남산을 정복시키겠다고 하니 당은 이 때가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라며 남생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평양으로 진군토록 했다. 어제까지 고구려 장군이었던 남생이 이끄는 당군사가 적이 되어 처 들어 옴에 고구려 군사들은 우왕좌왕 사기를 잃고 오합지졸이 되어 남생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서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총독이 되어 평양에 들어왔고 고구려는 건국 874년만에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으며 당나라는 남생에게 고구려를 정벌한 공로를 인정하여 집과 여자를 하사하고 당나라 서울 장안에 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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