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29 11:00
어우동의 끼와 대구에서 온 정인숙 鄭仁淑과 丁一權 1970년 정인숙 사건 직후에 나훈아의 노래<눈물의 씨앗>을 개사한 정인숙에 대한 노래가 한때 유행했다. (눈물의 씨앗은 당시 금지곡이 됐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만약에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영원히 우리만이 알았을 걸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고관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걸 죽고 나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어우동이 남긴 시 玉淚丁東夜氣淸 / 구슬은 흘러 밤을 밝히고 玉淚丁東夜氣淸 / 구슬은 눈물처럼 흘러 밤을 밝히고 白雲高捲月分明 / 흰 구름은 높이 흘러가니 달빛은 더욱 밝아라 間房叔謐餘香在 / 한 칸의 작은 방에는 임의 향기가 남아 있고 可寫如今夢裏情 / 꿈결 같은 그리운 정,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겠네 은장이와 어우동의 첫 만남 어우동(1430?-1480)은 11대 성종 임금때 궁궐에서 궁정을 총괄하는 응문원 지사 벼슬을 했던 “박윤창”의 딸로 충북 음성 태생이다. 어우동은 세종의 둘째형 태종의 서증손자 이동과 결혼 해 귀족 족보에 등재 됐다. 집안은 부유했고 미녀였으나 성품은 방탕했다. 옛날에는 사대부나 지체 높은 양반 집에서는 그릇 만드는 은장인(銀匠人)을 데려다 집안에 풀무 깐을 짓게 하고 몇 달씩 침식을 제공하고 그릇도 만들 게하고 제기(祭器)도 만들게했다. 왕족인 이동의 집에서도 마침 대사가 있어 은그릇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불러 그릇을 만들게 됐다. 어우동은 장인이 풀무 깐에서 웃통 옷을 벗어 던지고 땀을 흘리며 일하는 늠름한 모습을 문틈으로 훔쳐보고 설레기 시작했다. 장인에게 접근 할 방도를 궁리하다 묘안을 짜내게 되었다. 하루는 여종이 입던 옷을 입고 여종 행세를 하면서 장인이 일하는 풀무 깐으로 가서 말도 부치고 심부름도 하면서 친숙해 졌다.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장인도 이 집에 들어와 장인으로 일하는 처지이고 어우동도 이 집 종으로 일하는 같은 신세이고 보니 서로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어느 날 어우동은 “마침 집에 어른들도 없으니 술이나 한 잔 하고 좀 쉬도 록 하라”며 마루로 장인을 유인했다. 술상을 받고 어우동이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게 되었고 어우동은 자기 계책대로 장인을 안 방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여종이 아니라 주인 마나님이라는 것을 밝히고 정열을 불태웠다. 이후 어우동은 장인과 눈이 마주 칠 때마다 잠자리를 했다. 이로 인해 어우동은 소박데기 신세가 되어 집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여종도 같이 나왔다. 그 후 어우동은 기녀수업을 받고 기녀가 됐다. 어우동은 바람기가 대단한데다가 재색이 뛰어 났고 춤과 시문과 가야금을 잘 다루었고 그의 여 종도 바람 등이었고 얼굴도 잘생겼었다고 한다. 어우동과 여종은 서로가 서로를 숨겨주고 감싸주었다. 마지막에는 큰 길 가에 집을 얻어 놓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여종이 데리고 들어와 “마님 이 남자는 잘 생겼으니 마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제 것입니다” 라고 하면 어우동은 “그래 이 남자는 내 것이고 저 남자는 너에게 주마” 하며 죽이 맞아 하룻밤도 쉬어 가는 날이 없었다. 이 소문이 돌아 승정원 도승지 김계창(지금의 대통령실 비서실장)까지 알게 되었고 결국에는 어우동에 대한 어전회의까지 열리게 되었는데 이들과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은 곤장을 맞기 도하고 귀양을 가기도 했다. 가면 갈수록 자꾸 더 크게 터져 나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조정 전체가 큰일이 나고야 말게 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일로 사형하는 법이 없었고 바람핀 남자 곤장 80대. 여자는 60대 남자는 곤장 80대 여자는 60대를 쳤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 성종은 곤장 을치고 무마하려 했지만 사림파 사간원과 언관들의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상소가 빗발 쳤다. 결국 어우동은 삼종지도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이 됐다. “어우동”은 곤장60대로 끝내야할 "바람 죄"를 짓고 사형당한 최초의 여자가 되었고 왕실족보에서도 삭제됐다고 이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600 년이 지난 20세기 한국에 현대판 어우동이 나타났다. 정인숙은 나에게도! 첫사랑은 장사공 1970년 3월17일 밤 11시 마포구 절두산(切頭山: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 목을 친 산)인근 강변도로에서 검은 색 코티나 차안에서 정인숙이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현장에서 죽었다. 차 운전수는 그의 넷째 오빠 정종욱이었다. 정인숙은 해방되기 직전인 1944년 대구 남산 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정도환은 해방 후 대구 부시장까지한 자수성가형 관리로 6남매를 두었다. 정도환은 정인숙 위로 아들 넷을 두었고 마지막으로 쌍둥이 딸을 얻었다. 딸이 없던 집에 딸이 생기자 금이야 옥이야 길렀다. 이름도 큰애를 금지(金枝), 작은애를 옥지(玉枝)라했다. 쌍둥이 동생 옥지는 1년 후 죽고 언니 금지는 잘 커서 후에 서울장안의 사교계를 주름 잡았다. 그가 바로 고급요정 선운각(仙雲閣)의 미녀 왕언니 정인숙이다. 그때 정인숙의 나이는 26세였고 집에는 3살 먹은 정성일(1968년 생)이 있었다. 그의 빨간 가방 안에 있는 수첩에(일설에는 명함)는 대통령을 위시해 정일권 국무총리 이후락 박종규 등 27명의 최고위급 정치인들과 사회인사 들의 연락처가 있었다. 3살 백이 애는 최고위 권력자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국과수 부검결과는 낙태를 몇 번 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인숙의 꿈은 영화배우였고 한 영화감독을 만난 일도 있었으며 충무로 영화가를 전전하는 등 자기를 연예계로 이끌어줄 사람을 찾다가 시나리오 작가 장사공을 만났다. 사실 정인숙의 첫애인은 장사공이며 죽기 얼마 전에 사는 게 골치아프다며 그래도 장사공이 제일그립고 잊혀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장사공은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태양은 늙지않는다”라는 연속극을 집필 중에 있던 잘나가는 피디였다. 장사공은 모르는 여자한테서 전화를 받고 나가보니 생면부지의 단발머리 여학생이 방송국 라비에 있었는데 그가 정인숙이었다. 정인숙은 이대 영문과를 지망했다 낙방했지만 이대 빼지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후에 명지대 입학)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동거하게 되었고 정인숙집에서는 장사공을 사위 깜으로 대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가서 헤어졌다. 이유는 성놀 이에 지쳐여서였다는 것이다. 그 후 장사공은 정인숙이 요정에서 일 할 때 그의 어머니와 살고 있는 집을 수차 방문했는데 어느 때부터 인가 어머니가 문을 열어 주지 않고 박대했다. 그 무렵 까만색 지프차가 대문에 자주 와 있곤 했는데 그 지프차의 차번호는 가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사공은 그 차가 대통령차인줄알고 있었고 한번은 정인숙이 애를 업고 반도호텔에서 나오는 것을 봤는데 애의 귀가 박대통령 귀를 닮았다며 그 애는 대통령자식일거라고 그의 자서전에 썼다. 정성일은 고등학교 때 미국에 들어가 있다가 귀국해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소송을 두 번이나 제기 했다. 첫 번째는 정인숙 친정집 측에서 정성일을 설득해 취하했고 두 번째는 정일권이 하와이에서 죽는 바람에 취하됐다. 정성일은 외할머니(정인숙의 어머니)한테서 자랐으며 정성일은 외할머니로부터 네아버지는 정일권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컸다고 했다.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는 오빠 정종욱이 동생 정인숙을 죽였다고 했지만 정종욱은 절대 자기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고 살인죄로 19년 징역살이를하고 나와서도 우기고 있으니 정인숙의 살인사건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다. 정일권은 대통령에게 정인숙관계 실토 정인숙과 정일권에 대한 김종필의 증언은 어떤가? 김종필은 박정희대통령의 족하 사위고 박정희와 혁명을 같이한 혁명동지이고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부장으로 있었으며 국무총리를 하는 등 제2의 권력자였다. 박정희와 정일권은 동갑(1915)내기이고 출생한 달도 11월로 같고 생일만 박정희가 1주일 빠른 14일이고 정일권은 21일이다. 박정희가 18년 집권하는 동안에 정일권은 박정희 밑에서 17년을 국무총리로 여당 당 의장으로 여당 국회의원, 국회의장 등으로 제일 오래 벼슬을 한 행운아다. 게다가 만주 일본 군관하교도 정일권이 5년 선배고 일본 육사도 2년 선배라는 불가분의 인간관계가 있는 사이다. 그래서 박정희에 대해서는 정일권과 김종필 이두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종필(1926년생)은 11살이 위인 정일권에 대해 “정일권은 인생의 위기가 닥칠 만 한 지점에서는 묘하게 빠져나가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곤 했다”고 평했다. 김종필의 말을 빌면 정인숙이 죽기 전 수개월 전부터 서울정가와 워싱턴 대사관 아팎에서 정인숙의 뒤를 누가 봐주냐를 놓고 공론이 무성했다고 했다. 정인숙의 복수여권 정인숙은 복수여권을 소지(두개를 갖고 있다는 설도 있다)하고 일본과 미국 등 외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떵떵댔다고하니(내말 한마디면 안되는 게 없다는 등) 필경은 최고위급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그런 소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복수여권은 특권자에게만 내주는 특수여권인데 이 여권수속을 정일권 국무총리 비서관(신성재)이 주선했고 신원조회도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 비서실장(문학림)이 담당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김종필은 말했다. 정일권은 정인숙 말이 나올 때마다 자기는 억울하게 오해를 받는다며 다른 분이 관계됐는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시했다고 했다. 김종필이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맞났는데 박정희는 정일권이 막 왔다 갔다며 정일권이 정인숙과의 관계에 대한 자초지종을 실토하며 각하 살려달라고 호소했하면서 정인숙을 정일권에게 소개한 사람이 임자(김종필)라고 말하던데 그게 맞느냐고 김종필에게 물었다. 김종필은 당장 정일권에게 달려가 정인숙을 내가 당신(정일권)에게 소개 했다고 대통령에 말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정일권은 대통령이 갑자기 누구한테서 정인숙을 소개 받았느냐고 물어봐 정신이 막 돌 정도로 급해서 김종필 당의장이 소개 했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며 용서를 구했다고한다. 1966년 9월에 김종필이 공화당 당의장일 때 요정 선운각으로 일본 의원 20명과 정일권총리를 비롯한 한국 측 인사 몇 명을 초청했는데 그때 정일권 옆에 앉았던 파트너가 정인숙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종필은 다시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이렀다는 것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었다고 회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은 김종필에게 일국의 국무총리가 여자 문제 때문에 수사를 받으면(중략) 국격에 대한 문제라며 그래서 서울 지검(간첩 다루는 부서) 최대현 공안 부장한테 보안 사건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했다고 알려 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 처리되고 말았다고 김종필은 증언하며 정인숙과 박정희는 일면식도 없다고 했다. 신민당 당수 유진산과 정인숙의 亂倫 재담 이 엄청난 정인숙 남성편력은 당시 내무부장관인 이호가 국회 국정보고까지하게 됐고 보고를 받은 신민당 당수 유진산의 정인숙의 난윤(亂倫)에대한 질문은 재담급으로 국회의원들을 흥미있게 웃긴 얘기가 국회 의사록에 기재돼 내려오고 있다. (기회가 되면 못다한 정인숙 후속 얘기 계속 하겠음) (이 칼럼은 www.seoulvoice.com 과 www.cafe.net/mkchicago 문경회원 난에서도 볼 수 있음)
<한국민속 연구원 제439호 charakwoo@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