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4 17:19
못 다한 정인숙 鄭仁淑 이야기. 중정 부장 김형욱의 증언. 유진산의 대 정부 질문 |
과부와 잠잔 동네 李서방 鄭서방 高서방
옛날 어느 한 고을에 郭곽씨 성을 가진 두 사람은
늘 만나서 장기도 두고 술도 마시는 막역한 친구다.
술이 얼간해지자 친구가 곽 씨에게 과부 얘기를 하며 농담을 했다.
한 시골 동네에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 과부는 어우동처럼 끼는 없었지만 동네 이 남자 저 남자하고 잘 지내다
예기치 않은 남자 애를 생산했다.
애 이름을 지어야 하겠는데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과부는 고을 원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애 성명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원님도 묘안이 나지를 않아
한참 고민을 하다가 과부에게 물었다.
당신과 잠자리를 한 남자들의 성이 뭐냐고 물었다.
鄭가 李가 高가라고 했다.
그러면 당나귀 정鄭자를 파자해 꼬리부분과 李자를 파자해 아들子와
높을高를 파자해 윗부분을 빼내 세 획을 합치면 郭이 되니 곽 씨로 하라고 했다.
그래서 곽 씨는 3 성의 합작품이 됐다고 친구 곽 씨에게 농담을 했다.
제 3공화국 최대의 권력형 섹스, 살인 스캔들은 정인숙 사건이다.
사랑의 씨앗, 청와대 채홍사
그러면 정인숙의 3살 난 아들 정성일(또는 정승일)은
누구의 씨이며 정인숙은 누구와 잠을 잤으며 누가 왜 죽였을까?
정인숙은 첫 애인 장사공 PD를 처음 만날 때
5시 간씩이나 기다려서 만나는 등 장사공이 그의첫사랑이었고
죽기 전 친구에게 사는 게 골치 아프다며
그래도 장사공과 사귈 때가 제일 행복하고 그가 제일 그립다고 했다.
영화배우가 꿈이었던 정인숙은 장사공의 소개로
S영화사를 알게 돼 2.3편의 영화에 단역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고
임신 중절도 하고 장사공의 벌이가 시원치 않게 되자 싸움이 자자졌고
결국 헤어지면서 비밀요정 마담 김을 만나게 된다.
마담의 소개로 패션모델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마담이 경영하는 한 남동 고급요정에 발을 디디게 되면서
이름 금지(金枝)를 인숙으로 바꾸고 유명한 선운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치계의 모씨 또 모씨 그리고 또 모씨 등은
서로 정인숙을 독차지하기위해(3각 4각 관계로) 아귀다툼까지 했다.
정인숙은 이렇게 값이 올라가자 요정에 오는 손님이
누군가를 알아보고 웬만한 이름(일유 급)이 아니면 응하지도 않았다.
한 정치인의 증언에 따르면
채홍사 (採紅使; 여자를 뽑는 일만 하는 사람)에 의해 뽑혀다니는
당시 여배우와 가수를 포함한 접대부중 정인숙의 미모가 1위였다고 한다.
청와대 모임에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2백여 명의 아가씨들이 차출 됐는데 그 중에서 50명을 먼저 뽑고
다시 신원조회를 통해 25명을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모 순으로 5명중 정인숙이 1등으로 뽑혔지요.
미스 코리아에 나가려고 했지만 집안에서 반대해 나가지 못했고
영화배우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요정에서는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에 영어도 특출하게 구사하는 등
외국인에게 까지도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런 증언으로 보아 소문으로만 들리던 당시
청와대를 위한 채홍사(採紅使)가 있었다는 말이 허위가 아니었다고
“3 공의 정치는 요정정치”였다는 것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계 상류층의 성윤리는
매우 문란해 있었음을 알 수가 있고
일본에서까지 소문이 자자했었다고 한다.
일본 정계의 거물 고다마 요시오가
“여보시오 김형욱 중정부장 할 말이 있소”라며
김형욱에게 한국 정치인의 문란한 色道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김형욱 회고록 3권 참조).
1968년 6월에 정인숙은 아이를 낳지만
누구의 아들인지를 밝히지 않아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놨다.
애를 출산한 후부터 정인숙은
“내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이,
서교동 집도 애 아버지가 사준 것이라는 이,
내가 난 아들의 아버지는 상상도 못할 사람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며 다녔다.
그러니 애아버지가 대통일 것이란 말도 유포 됐고
정일권이라는 말도 언론에 퍼졌고 국회에서까지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인숙은 복수여권(두개)을 1968년 12월 30일자로 발부받고
말 많고 씨끄러운 한국을 떠나 일본을 다녀오는 등
미국에 와서도 3개월 동안 아들을 데리고 있다 귀국 했다(1970년).
미국으로 그를 인도한 것은 워싱턴 한인회장 노진환이었다.
당시 특권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수여권을 정인숙이 받은 것을 보면
최고위급 정치인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졌고
그가 정일권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여러 권력자들과 피스톨 박종규의 이름도 터져 나오는 등 정치계가 소란해졌다,
그래서 정치권에선 골치 썩히는 정인숙을 외국으로 내보게 됐다.
중정부장 김형욱과 워싱턴 한인회장의 기이한 증언
노진환 워싱턴 한인회장과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정인숙에 대해 주고받은 얘기는 전입가경이다.
이때 김형욱(육사 8기)은
박정희 3선 개헌의 역군으로 일등공신임에도 팽(烹)당하고 워싱턴에 망명해 있을 때다.
노진환은 김형욱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김형욱(이하 김)_정인숙이라는 여자 애기좀 들어 봅시다 그 여자가 그렇게 좋다며?
이에 대해 노진환(이하 노)은 말문을 열었다.
노_사실은 제가 한 일주일 쯤 데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여자 피부가 대리석 같아요.
나이가 스물너댓 정도인데 육체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제 평생 그런 여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 뿐인 줄 아십니까 그 여자는 “님포메니아”였어요.
김_그게 무슨 뜻이오?
노_“색정광여인”이란 뜻이 남자 없이는 하룻밤도 못자는 여자입니다.
그냥 자꾸만 해달라고 밤새도록 붙들고 있는 통에
제가 녹아웃 돼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곯아떨어져 자다가도 어쩐지 불편해서 눈을 떠보면
성기를 입으로 물고 있질 않겠어요! 정말 제가
그러다간 죽을 것 같아서 나중엔 도망쳐 버렸습니다.
김_허허 대단한 여자였던 모양이군 듣기에는 가문도 상당하고
아버지가 대구 부시장을 지낸 적도 있다는데
천성이 그런 모양이구려
<참고; 정인숙어머니가 정인숙을 데리고 의사한테 갔는데
진찰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의사가 어머니만 따로 불러
따님의 피부가 유난히 특이하다며 앞으로 조심시키라고 충고를 했는데
이 말을 정인숙이 몰래 들었다고 한다)>
노_그 여자 말에 의하면 자기가
박정히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부장, 박종규 실장 등
내로라하는 권력자들과
모두 관계를 맺었다고 우쭐대던 걸요 전화번호까지 가지고 다니고!
김_여보시오 노진환씨 나도 도덕군자는 아니오만
젊은 시절 말술을 불사하는 주호였고 미인을 즐기는 풍류도 있었소.
그러나 정인숙이라는 여자는 평생 본 일이 없소.
당신 아무데나 그런 무책임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마시오 알아 듣겠소?
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3권 240-250 페이지. 박사월; 김경재 대필).
실제로 정인숙이 피살 되던 그 날에도
두 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가졌고
남자 성모(姓毛)가 목구멍에서 발견 됐다니
보통여자는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피살되자 국과수가 공개 검시).
고국을 떠나 있든 정인숙은 무료한 외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갑갑해 하면서 정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했다.
이때부터 정인숙은 홀로 호텔이나 캬바례 등을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고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남성편력도 했다.
남산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 나를 놔주세요
이 때는 주로 돈 많은 사람이나 돈 잘 쓰는 사람들과 만났다.
정인숙은 죽던 날도 남산에 있는 18층 나이트클럽에 갔다.
클럽에서는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일보사 정홍택 연예부 기자도 8시 쯤 도착 해
카운터에 앉자 마나기로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두 자리 건너에 한 여자가 앉아 술을 마시며 술을 한잔 하겠냐고 물었다.
아주 미인이었고 얼굴색이 하얀 것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홍기자는 기분은 좋았지만 여자가 먼저 술을 권하는 바람에 쑥스러웠다.
그런데 그 여자는 우울하게 보였고 금방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밴드에게 연주해 달라며 노래 곡목을 주었다.
그 노래는 “릴리스 미 Release Me”이었다.
당시 이 노래는 세계적으로 대 유행 했던
영국의 엥겔버트 험퍼딩크가 부른 히트 곡이었다고 한다.
곡도 그렇고 가사의 내용도 애수적이고 사랑에 불만과 한탄이 깃든 사연이다.
“나를 좀 놔주세요/ 떠날 수 있게 놔주세요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나한테는 새로운 사람이 생겼답니다/ 당신의 입슬은 차겁지만
그의 입슬은 따둣합니다/ 라는 뜻의 노래 가사다.
그녀는 이 노래를 세 번 네 번 번복해 연주를 부탁했고
밴드는 계속 연주했다.
홍기자는 이 여인이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그 여자는 9시 좀 지나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그리고 홍기자는 남아서 좀 더 술을 마시고 11시가 지나서 집으로 갔는데
카운터에서 술을 권했던 그 여자가 바로 정인숙이었고
정인숙은 그 후 2시간이 후에 그 집 앞에서 피살 됐다
(검사의 발표에는 강변로 돼 있다).
최대현 담당 검사는 타워호텔에서 만났던 28명의 참고인을 조사했고
정인숙이 타워호텔에서 나와 제3의 사람을 만난 것이 확실한데도
이에 대한 답은 발표하지 않았다.
운전을 했던 정종욱의 진술은 동생 인숙을 태우고
집에 도착하자 3미터 앞에서 40대의 남자가 길을 막아 차를 세우고
괴한은 오른쪽 앞문을 열고 운전자 머리 뒤로 손을 뻗어 권총 3발을 발사해
인숙이는 그 자리서 쓰러졌고
정종욱 자신은 오른쪽 다리가 따끔한 것을 느끼고
쓰러졌다 일어나보니 범인은 달아난 후였다고는 것이다.
정인숙은 바로 국과수로 옮겨져 공개 부검 됐고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 공동묘지에 안장 됐다.
진실은 많이 왜곡된 채 유언비어만 무성하게 남아 있다.
대통령 부부 재떨이 육박전과 유진산의 대정부 재담
검 경의 조사 중 부주의로 정인숙의 수첩에 적혀 있는
대한민국 권력자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누설 됐다.
바정희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정부장, 박종규 경호 실장,
장 차관, 국군 장성, 5대 재벌 회장,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 27명을 포함한 권력 실세들 수십 명이다.
사건 직후 나훈아의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개사한 노래가 확산 됐고
이 가사를 육영수여사가 어데서 구해 들고 와
대통령에게 보여주며 따지는 바람에 박정희 대통령과 부부싸움이 벌어져
재떨이를 던져 영부인의 눈퉁이에 멍이 들은 것이 소문이 나자
”육박전“이란 풍자어가 생겼다.
비서실장 김정렴은 시중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데도 보고 하지 않았다고
대통령에게 불려가 눈물이 쑥 빠지게 혼나는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사건의 불똥은 국회에까지 튀었다.
당시 법무부장관 이호가 임시국회에 나와 국정보고를 하며
정인숙사건을 자세히 신중하게 보고 했다.
국회속기록에 의하면 A용지 4쪽 분량이나 되었으며
이렇게 자세하게 보고한 이유는 정 인숙사건을 이 보고서로
야당이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아 달라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산은 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사건에 대해 통렬하게
정부의 대처방식의 잘못되었음은 비꼬아 비판해
국회의원들을 여러 차례 웃겼다.
대통령이 법무장관과 여러 각료를 국회에 보내
국정보고를 한다기에 무슨 큰일인가 했더니
겨우 요정정치의 산물인 한 괴 미인의 난륜(亂倫)에 대한 사건을
국정보고라고 한 것은 국격에도 안 맞고 웃음꺼리라고 비꼬았다.
<어제 이호 법무가 올라 오길래
무슨 법무 행정의 주요 문젠가 했더니
느닷없이 웬 강변3로 여자 살인 사건이란 말야(웃음소리).
대통령이 여자 살인 사건을 갖고서 모처럼 안 하던 결심을 해 갖고서
전 각료들을 국회에 내보내 자진 보고케 하라고(웃음소리).
질문이나 하면 그때 가서 거짓말을 하든지 말든지(웃음소리).
무슨 놈의 오빠가 여동생의 난륜(亂倫)을 분개해 가지고 권총을 쏘았다고.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 문제를 참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보고하느냔 말야(웃음).
미인사건이라니까 여러분은 흥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친절은 없어도 좋지 않느냐 이거요.
국회의원의 질문이 나올 텐데 대통령 지시로 나온 분께서 하필
그 정인숙이라는 괴미인 살인 사건을 장시간 보고하니까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이겁니다>.
대사(大蛇), 큰 뱀으로 불렸던 유진산은 권모술수와 밀실정치에 뛰어났다.
당시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은 유진산과 일부 야당 인사들에게 접근해
정인숙 사건을 쟁점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진산은 이를 쟁점 화했고 뒤이어 다른 야당인사들도
대정부 질문을 통해 정인숙 사건을 쟁점화시켰다.
정인숙의 수첩에 연락처가 있다고 정인숙이
그 많은 사람들과 잠자리를 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제 3공화국은 군부의 정치였다. 더구나 나라돈으로 날이 새면
나라사랑에 대한 훈련만 했던 육사 출신들이다.
애국정신으로 무장한 육사생들의 문란했던 요정청치가 어떠했다는 것과
당시 대한민국 국정이 요정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돼 너무 씁쓸하다.
(이 칼럼은 www.seoulvoice.com과 www.cafe.daum.net/mk chicago 문경회원 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민속 연구원 제441호 charakw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