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5 16:50
구노의 아베마리아 성모송. 천주교 전라도 진산사건.
청교도 원주민 박해
영국 국교의 청교도 박해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개신교(장로교) 청교도들이
영국의 국교(구교 )로부터 배척을 받고 발 붙일곳이 없자
이나라 저나라로 피신하다 마지막 살길은 신대륙
미국밖에 없다며 배싻을 융자(融資)한 돈으로
상선(商船) 메이훌라워호를 타고
101명이 보스톤 인근 (케이프커드, 프리므스, 제임스 타운)으로
망명해 신천지를 개척했습니다.
식량부족과 추위와 병마에 시달린 청교도들은
한 겨울이 지나자 반으로 줄었습니다.
인디언 원주민들은 청교도들에게
식량과 음식을 주기도하고 종자(種子)를 주며
농사짓는 방법도 알려주고 사냥도 같이 다니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2년이 되는 해에 풍년이 들자
인디언 원주민과 청교도들은 한데 어울려 신에게
감사하의 축제를 했는데 이 축제가 땡스기빙의 시초가 됐습니다.
그래서 땡스기빙은 미국본토에만 있는 축제입니다.
청교도들이 정착하자 영국정부는
미국 식민지 정책을 수립하고 토지를 나누어 주는 등
이민을 장려하기에 이르렀고
유럽의 백인들이 신천지 미국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인구가 팽창되자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뺏기 시작했습니다.
문자를 모르는 원주민들에게 술과 아편을 주고
물물교환으로 땅을 헐값으로 뺐고 술과 아편에 취한 원주민에게
연필을 손에 쥐어주며 계약서에
X자나 동그라미를 그리게 해서 땅을 점령했습니다.
문맹이었던 원주민들은 토지소유개념도 없었고
X나 동그라미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술과 마약에 취해 동그라미를 그리고 하루밤을 자고나면
백인들이 원주민 땅에 철조망을 치고 말뚝을 박아 놓고
어제까지 땅주인이었던 원주민을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자 원주민들은
백인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박해 받은자가 굴러와 원주민을 박해
백인들은 국토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서부개척정책을 세우고 토지를 점령해 나가자
이를 막기위해 원주민들은 무기를 들고 전쟁까지 했습니다.
그 때는 원주민들이 숫자적으로 강세였기 때문에
백인들은 위협을 받았습니다.
백인들은 음식을 장만해 놓고
이웃에 있는 원주민 추장들을 초청했는데 원주민 추장들은
휴전협상을 하기 위해 오라는 줄로 알고 추장 4명이 참석해서
음식과 술을 마시며 방심한 틈에
미리 예비해둔 무장한 백인들이 처들어와 추장들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잘린 목을 장대에 매달아 청교도 정착촌에
20년 동안이나 매달아 두고 원주민들을 위협하고 경계했다는 것입이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청교도들이 정착한 1620년대 부터
1890 년대까지 250 여년 동안 백인들에게 학대받고 학살당하며
광활한 땅을 백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설치한 320개나 되는 보호구역으로 쫓겨나
백인들이 나누어 주는 배급으로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수용소에는 물도 없고 풀도 없는 불모지여서 농사도 지을수가 없었고
세상밖을 나오지도 못하고 교육이나 문명의 혜택도 없이
술과 마약으로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평균 수명은 30세였다고 합니다.
현재 아메리칸 인디언족은 미국인구의 1.5%에 해당하는
450만 명이며 미국 정부는 땅을 뺏은 보상으로
세금을 면제해주고 카지노 사업권과 온천사업권의 혜택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제일 무서운 전쟁은 종교인들이 한다
미국정부는 5년 전인 2010년 5월20일에
원주민들에게 과거에 잘못됐던 정책에 대해 사과 했습니다.
상원에서 통과된 결의문을 공화당 샘 부라운 백 상원의원이
위싱턴디씨 의회 묘지에서 인디언 부족대표들을 모아놓고 낭독했습니다.
현재 미국땅에 공인된 인디언부족은 625개족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종교인들이 저지른 모습의 한 일면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슬람 과격파 수니의 퇴로 사건은
온 지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습니다.
테러 때문에 비행기도 맘놓고 타기가 불편해 졌습니다.
프랑스는 기차를 탈때도 검색을 한다고 합니다.
자녀들 학교 보내는 것도 걱정이 됐습니다.
종교전쟁이 전쟁중에서는 제일 무서운 전쟁입니다.
그래서 세계평화는 종교로인한 분쟁이 없어져야 가능하게 됐습니다.
이슬람 수니파는 지금 기독교 십자군과의 전쟁이라며
무지막지한 살상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반도에도 인간교조 김정은은 숭배하면서도
기도교를 탄압하는 북한이 있습니다.
조선말기에 우리도 천주교 탄압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탄생한 성모송 구노의 아베마리아는
세계사람들이 좋아하지만
한국의 천주교 박해로 순교한 신부들의 슲은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천주교 박해와 전라도 진산 제사(祭祀) 사건
조선의 천주교는 선교사를 통해 들어오지 않았다.
자연 발생적인 천주교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특이한 천주교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지난해(2014) 여름에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100만명의 군중이모인 가운데서
124위의 순교자를 복자(福者)로 선포했다.
복자는 성인(聖人)이 되기 직전 단계다.
124위의 복자중에는 이조 말 때 선비
윤지충 바오로라는 사람이 있다.
1790년 중국 베이징에 있는 천주교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 천주교에 “제사(祭祀)금지령”을 내렸다.
전라도 진산(지금의 금산)에 사는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은 함께 구베아 주교의 제사금지령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조상들의 신주를 불살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 생활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자 윤지충은
혼백도 만들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않고 어머니가 유언 한대로
가톨릭 예식대로 장례를 치루자 종친들이 분노했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지며 당쟁으로까지 번져 정치화 됐다.
정조임금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들은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그리고 전주 감영에서 혹독한 고문과 문초를 받으면서도(중략)
제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믿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라며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감사는 이를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정조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이로서 두사람은
무부무군(無父無君; 부모도 임금도 없는 자식)의 사상을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1791년 12월8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가 됐다.
이것을 “진산 사건”또는 “신해교란”이라한다.
조상 제사지내는 것 때문에 조선 천주교 제1호 신부 이승훈도
베드로가 닭울기전에 세번 예수를 배반 한 것처럼
천주교를 세번이나 배교를 번복했다. 그 때에 제사를 안 지내는 것은
곧 조상을 배반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코 고황은 방한 마지막날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타 종교 지도자 12명을 만났다.
서정기 성균관장은 금색보자기로 싼
선물(용봉난린기. 새시대를 열자는 글귀)을 교황에게 건네며
“한국천주교 교인들이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공인해 주어서 고맙다
(1994년 로마교황청이 공인)고 말했다.
이번에 복자로 시복된 윤지충이 제사를 거부하고 죽은지
203년만에 천주교 신자들이 제사를지내게 된데 대한 치하였다.
가수 조수미의 아베 마리아 성모송
프란체스코 교황은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를 했는데 미사직전 행사에서
천주교 신자인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 데레사(52)는
구노의 아베마리, 혼혈가수 인순이 세실리아 (57)는
본이이 어려원던 시절과 꿈이 담긴 ”거위의 꿈“을 불렀다.
구노의 아베마리아는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와 함께
제일 많이 불리는 성모(聖母)송이다.
구노는 19세기 프랑스의 대 작곡가다.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사제가 되려고 했던 독실한 신학생이었다.
1867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하는 등 시대적인 작곡가였다.
1885년 성녀세실리아 미사곡을 작고하고는 세속적 명성을 멀리 한채
파리 외방 전교회(신학교) 성가대 대장으로 종교 음악에 전념했다.
이 때 조선에서 전교하던 친구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두문 불출 눈물을 흘리며 영감에 젖어 성가를 작곡했는데
이곡이 바로 친구를 위헤 성모에게 축원하는 내용의 구노의 아베 마리아다.
구노는 이 친구에게 조선에 가면 죽는다고 만류했다.
순교한 친구는 다블뤼(Daveluy,1818-1866)신부다.
조선 천주교 제 5대 교구장으로 "갈매 못"에서 순교 했다
(다블뤼신부의 시신은 명동성당에 묻혀 있다).
다블뤼 신부는 조선에 있으면서 프랑스 외방 전교회로
조선에 대한 비망기를 보냈는데 "프랑스 외방 전교회"는
이 비망록을 모아 책을 발행(1874)했다.
한국천주교 역사는 바로 이 책에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1866년에서 1872 년까지 6년 동안 천주교 신자 8 천여 명이 학살 되었다.
이것을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이라고 한다.
구노(Gounod, C. F., 1818-1893)와 다블뤼신부는
나이도 동갑(1818년 생)이고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서같이 생활 했던 친구다.
구노는 1866년 조선에서 친구 다블뤼 교구장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869년에 친구와 조선의순교자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구노의 이 성곡(聖曲)은 한국천주교에서 부르는
"무궁무지세에"(한국 카톨릭 성가 284번)다.
오늘날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구노의 "아베마리아(Ave Maria)"는
친구 다블뤼 주교를 위한 곡이고 조선의 선교사들을 위한 곡이라고한다
(앙베르를 위해 작곡 됐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아베(Ave)라는 라틴어는 "안녕하십니까"라는 뜻으로
AveMaria는 "안녕하십니까 마리아 성모님"인데
한국에서는 성모송(聖母頌), 성모경(聖母經)이라고 요약해 말한다고한다.
아베마리아로 유명한 곡은 수베르트의아베마리아,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구노의 아베마리아 등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에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제일 종교적이고
경건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구노의 아베마리아는 세계의 어느 성모송보다 인기가 많은 성모경이라고 한다.
병자호란과 환향녀
당시 중국 땅에는 명나라와 후금이있었다.
오랑캐인 후금(누루하치)이 청(靑)으로 국호를 바꾸고(1636)
조선에 공물을 바칠 것과 명나라를 치려하는데 원군을 보내라고 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친명파와 친청파로 갈리어 격론 끝에 명나라에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친명파의 주장대로 청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청은 12만의 군사를 조선에 보내 3일 만에
한양까지 밀고 내려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1만 3천의 군사로 항전 했지만 45일 만에 항복하고
청군이 삼전도(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의 7가지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장자인 소현세자와 차자인 봉림대군은 볼모로 가청나라로 끌려갔다.
청군은 이때 수만명의 부녀자들과 친명파를 포로로 납치 해갔다.
청은 잡혀온 포로들을 등급을 매겨 집단으로 농사를 짓게 했다.
인조는 포로들을 송환해 줄 것을 요구 했지만
청은 등급대로 돈을 요구 했다. 조정은 백성들이 각자 돈을 내서
포로된 자기 식구들을 데려오게 했다.
이렇게 해서 돌아온 부녀들을
환향녀(還鄕女.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 했다.
부녀자들은 오랜 동안 포로로 집단생활을 하면서
청나라 남자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기도 했는데
이 자식들을 오랑케의 자식이라 해서 호로(胡虜)자식이라 했다.
부녀자들 몇 만 명이 한곳에서 집단적으로 만 리나 떨어진 이방지대에서
기약 없이 농사를 지으며 노예생활을 했으니 성이 문란해 졌고
중국 성문화가 조선에 도입 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됐다.
환향녀들은 바깥출입이 금지 되었다. 인조는 이들의 죄를 사하는 방편으로
홍제천(弘濟川)의 물로 몸을 씻고 오면
다시는 정조에 대한 논란을 하지 못하게 교지를 내렸다.
지금 서울의 홍은동이란 동명은 환향녀들이
왕의 홍은을 입었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볼모가 됐던 소현세자는 성격이 활발하고 개화적이어서
북경 천주교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을 하면서 수리 천문 지리 성경 등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귀국할 때는 책도 많이 수입해 왔다.
이 때 이미 천주교가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온
궁인들에 묻혀 조선에 들어왔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프랑스 극동 함대가 강화도 점령. 병인양요
천주교 박해가 심해지자
일부 신부들은 중국으로 도피했고 14명의 프랑스 신부가 순교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신부들을 죽였다고
7 척의 극동함대에 1천200명의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점령하고
많은 금덩어리와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 등
서적을 강탈해 갔다(1866 병인양요).
앙베르(Imbert 1797-1839)와 샤스탕(Chastan 1803-1839)신부는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체포 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앙베르 신부는 제 2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돼자 중국에서 걸어서
조선에 들어와
정하상(丁夏祥,1795-1839. 정약용의 친 족하, 기해박해 때 순교)의 집에 숨어서
포교하다 기해사옥(己亥邪獄) 때 순교 했다
(시카고 북부에 정하상 신부의 이름을 딴 천주교회가 있다).
(이 글은 www.seoulvoice.com 과 www.daum.net/mkchicago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국 민속 연구원 제460호 20151217 charakw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