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2 13:58
어우동의 바람끼. 이조실록에 기록된 희대의 여성.
조선땅에 왔는데 조선인이없다. 양반과 소실. 임금은 무치다.
어우동 於宇同은 시카고 링컨 길에 있던 식당 이름 이었다. 그 이전에는 일본 식당이 있었는데 식당 주인은 서울의 다옥정(지금 한국은행 옆)에서 출생한 일본 여자였다. 이 식당이 한국 사람의 손으로 넘어와 “덴가스” 일본 식당이 되었다가 다른 주인으로 또 바뀌면서 이름이 “어우동”이 됐다. 새로 들어온 주인은 식당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궁리하다 “어우동”으로 정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이조 실록에 기록될 만큼이나 유명했던 “어우동” 이라는 이름을 부치면 누구나 쉽게 알 것이라는 선전효과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어우동은 이조 초기에 궁궐에서 궁정을 총괄하는 응문원지사 벼슬을 했던 “박윤창”의 딸이었다. 집안은 부유했고 얼굴은 곱고 잘 생긴 미녀였으나 방탕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시집은 잘 갔다. 군수를 지낸 왕족 “이동” 이라는 사람에게 출가를 했는데 출가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람 끼가 도졌다. 옛날에는 지체 높은 양반 집이나 부잣집에서는 그릇 만드는 장인(匠人)을 불러 집안에 풀무 깐을 짓게 하고 한 두 달씩 메기고 재우면서 그릇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왕족인 이동의 집에서도 마침 대사가 있어 은 그릇을 만드는 장인을 불러 그릇을 만들게 했다. 장인은 풀무 깐에서 풀무질을 하며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뜨거운 풀무 앞에서 장인은 웃통을 벗어 던지고 땀을 흘리며 일했다. 늠름한 장인의 모습을 문틈으로 훔쳐 본 어우동은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반 집 규수로서는 장인에게 접근 할 방도가 없었다. 궁리 궁리하다 묘안을 짜냈다. 하루는 여종이 입던 옷을 입고 여종 행세를 하면서 장인이 일하는 풀무 깐으로 가서 종의 행세를 하며 이런 저런 말도 부치며 심부름도 했다.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장인 자신도 이집에 들어와 일하는 처지이고 어우동도 이 집 종으로 일하는 처지이고 보니 유유상종이라고 서로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어우동은 말했다. 마침 집에 어른들도 없으니 술이나 한 잔 하고 좀 쉬도록 하자며 마루로 장인을 유인했다. 이에 장인은 마루로 올라와 미리 차려 논 술상을 받고 어우동이 따라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얻어 마시게 되었다. 어우동은 자기 계책대로 장인을 방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여종이 아니라 주인 마나님이라는 것을 밝히고 정열의 한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후 어우동은 장인과 눈이 마주 칠 때마다 정열을 불 태웠다고 한다. 남편이 어쩌다 낮에 집에 들어오면 장인을 벽장에 숨겼다가 남편이 나가면 다시 사랑놀이를 했다. 어우동의 바람끼도 대단했지만 그의 여종 또한 어우동 못지 않은 바람둥이이었고 얼굴도 잘생겼었다고 한다. 주인과 여종은 서로가 서로를 숨겨주고 감싸주면서 바람을 폈으니 그 주인에 그 종이 어우러졌던 것이다. 이로 인해 어우동은 소박데기 신세가 되어 집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여종도 같이 나와 한 주막에 살았다. 여 종은 화장을 짙게 하고 저자거리에 나가 헌칠하고 잘생긴 남자를 유인해 이 남자는 주인 것이라며 어우동에게 주고 저는 또 저자로 나가 다른 남자를 데리고 들어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큰 길 가에 집을 얻어 놓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여종이 유인해 데리고 들어와 마님 이 남자는 잘 생겼으니 마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제 것입니다 라 하면 어우동은 그래 이 남자는 내 것이고 저 남자는 너에게 주마 하면서 서로 장구를 처가며 하룻밤도 쉬어가는 날이 없었다.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퍼져서 임금님 앞에서 어우동에 대한 어전회의까지 열리게 되었는데 이들과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은 국문을 받고 관직을 파직당하기도 하고 귀양을가기도 했지만 끝도 한도 없이 자꾸 터져 나왔다. 결국 어전회의에서 어우동을 죽이자는 공론도 나왔다. 하지만 이런 일로 귀양을 보내는 법은 있으나 사형시키는 법은 없으니 법에 따라 “어우동”을 귀양을 보내자고 했다. 그러나 임금은 법은 없다해도 사형에 처해 미풍양속을 지켜야한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아 “어우동”은 결국 비명에 죽었고 역사상 바람 피우고 사형 당한 최초의 여자가 되어 이조실록에까지 기록되어 있다. 어우동은 역적도 아니면서 역적처럼 죽었다.
조선땅에 왔는데 조선사람이 없는 나라. 양반과 소실
1894년에서 1897년 사이에 영국의 지리학자이며 황족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는 여자가 4번이나 한국을 방문하여 11개월 동안 머물면서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란 기행문을 썼는데 이 책이 당시 서구에서는 매우 희귀한 책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서양사람들이 이 책을 구하려 했지만 구하지 못했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14판을 거듭했고 이 책을 쓰기 위해 비숍은 빈대와 벼룩이 들끓는 주막에서, 소 외양간 방 쇠똥내 나는 데서 자고, 변소에서 수채에서 시궁창 내 나는 서울 뒷골목 까지 살피면서 기행문을 썼고 서양인으로서는 고종황제를 제일 가까이 하고 민비와도 친해서 수시로 궁에 드나들면서 재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한국말도 못하면서 한국 토속 종교와 무당, 박수, 신 내림굿에 대한 것, 푸닥거리 등 귀신 서열 36 개를 나열한 것이라든지 그 당시 경제사회 문화 정치에 대하여 그렇게 자세하게 숫자까지 기록한 기행문을 아직까지 본 일이 없다. 일본을 통해 배로 부산에 도착하여 보니 한국사람보다 외국사람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고 한국세관에는 한국인은 없고 독일 사람이 세관 업무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나, 서울에서는 쏘련 군인이 한국 군대를 훈련시켰다는 것 등은 지금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한국 땅 제물포(인천)에 왔는데도 한국사람들은 안보이고 중국 사람과 일본사람들이 부두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897년 1월 현재 부산, 원산, 제물포의 항구에는 외국인이 11,318명이 있었고 266개의 사업체가 있었으며 일본 돈과 한국 동전과 수표가 유통되었고 일본인이 10,711명이고 회사는 230개이었다고 한다. 영국인은 65명이 있었고 중국인은 2천5백 명쯤 되었는데 서울과 인천에 주로 있었다고 한다. 비숍씨는 왜 한국 땅인 부산과 제물포에 왔는데도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하면서 한국사람에 대해서는 말이 없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왜 그랬을까? 분명 한국 땅인 데도 한국사람은 눈에 띠지 않아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가 없었다. 당시 양반 사상에 젖은 우리 조상들이 장사하는 사람, 뱃사람이나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을 쌍놈이라고 하여 혼인도 하지 않던 고루한 유교사상 때문이었다. 바다나 바다 근처에서 살면서 노동을 하고 장사를 하는 것을 천시했기 때문에 인천과 부산에 한국인들이 없었다. 어른들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공자 맹자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리학이 한국에 들어온 후 몇 백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공자와 맹자에 대해서는 누구도 비판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이조시대에는 공맹 사상에 젖어 이 사상이나 가르침에 어긋나면 관리이건 고관대작이건 그 누구도 던 다 역적이 되어 삭탈관직되기도 하고 귀양도 갔으며 절대권력자인 왕도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들고 나오는 신하에게는 꼼짝달싹 못하고 그 말을 들어주었고 훌륭한 신하라고 칭찬까지 했던 시대였다.
임금은 하늘아래 부끄러울 게 없다. 임금은 무치다
비숍이 또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한국의 양반들은 근엄하고 예의 바른데 사랑 놀이는 본처와 하는 것이 아니라 첩실이나 기방의 여자와 한다는 것이다. 본처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아들을 생산하고 제사 준비를 하고 노비를 다스리며 살림을 하고 남편이 바람을 피워 질투를 하면 투기(질투)는 칠거지악이라고 질투도 못하게 해 놓고 자신은 밖에 나가 바람을 피우고 다녔으니 서양사람으로서는 이런 양반 님들을 이해 할 수가 있었겠는가. 남편은 사랑방에 있다가 가끔 안방에 들어가 본부인과는 존댓말을 하면서 가문이나 집안 일을 상의하고 다시 사랑방으로 나오는 이런 생활습관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나라 양반 님들의 생활상이었다.
궁궐엔 궁녀만 500명
임금과 궁에서 정사를 보다가도 해가 지면 모든 남자들은 누구나 다 퇴궐하는 법에 따라 해야 궁내에는 쓸만한 남자는 임금 하나이고 나머지는 궁녀들과 쓸모 없는 내시들 만 있어 궁 안은 온통 여자 세상이 된다. 더구나 임금은 무치(무슨 일을 해도 부끄럼이 없다)라 하여 누구와 무슨 일을 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임금 이야말로 산해진미와 꽃같은 궁녀들 틈에서 살다 일찍 죽었다. 11대 중종 임금 때 개혁파 조광조는 당파 싸움으로 온 나라와 조정이 혼란해 짐에 임금을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로 해 진 뒤에도 퇴궐하지 않고 궁에 남아있다는 죄로 탄핵 상소를 받아 삭탈관직되고 귀양가서 죽었다. 임금은 무치다. 물 깃는 무수리나 침모나 밥짓는 궁녀나 누구든 상관없이 왕손을 생산하기 위해 정사를 할 수 있고 왕손을 생산한 궁녀는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임금의 은혜를 받았다 하여 빈이니 숙이니 하면서 벼슬을 내렸다. 그러니 궁녀들은 임금 하나만 바라보고 일생을 보냈다. 역대 임금 중에는 무수리 아들도 있다. 궁녀는 9품에서 5품까지 있다. 제일 높은 급수가 5품(상궁)이다. 하지만 임금의 은혜를 받으면 4품(숙원)이 된다. 궁녀는 5품에서 임금과 관계를 맺지 안는 이상 4품으로 올라가지를 못하고 죽는다.(당시 궁녀 400-600명). 지금은 대통령이 돼도 무치는 아니다. 지금에 어찌 통을 무치라 할 수 있겠나! 만시지탄이다
차락우 칼럼 매주 목요일 www.seoulvoice.com에 게재 됨.
한국 민속 연구원 20211104 제753호 charakwo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