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9 17:56
왕과나 성종과 폐비 윤씨. 조선 왕조 실록, 세계문화 유산.
김일성 3부자 실록은?
육영수 친정 아버지 이야기
조선왕조실록. 청와대 일지. 김일성 3부자일지는 ?
조선왕조실록은 888책, 1893권이나 되는 방대한 조선왕조 기록이다. 실록은 임금과 신하가 대화한 기록인데 지금의 국무원일지와 같다. 고려 왕씨 34왕 474년, 이씨 조선 27왕 518년(순종 죽은 해까지)까지 합쳐 천년 사직에 대한 기록을 우리는 보존하고 있다. 지구상에 천년 역사기록으로 갖고 있는 나라는 한국 뿐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어느 나라에도 천년 동안 임금이 신하들과 이야기한 대화 기록은 없다. 고려 때에는 임금이 죽고 그의 신하들도 죽은 후에 그 임금의 업적을 기록해서 역사에 남겼다. 임금은 죽었다 해도 신하들이 살아 있으면 이들의 영향을 받아 승자의 기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하들이 죽은 후에 그 임금에 대한 기록을 정리 했다. 그만큼 역사는 누구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공정하다는 전통을 지킨 것이다. 하지만 이씨 조선 3대 태종(이성계의 3남 이방원)은 이성계가 죽자 “실록은 바로 써야 생생한 역사기록이 된다는 구실을 부쳐 하륜에게 태조 실록을 편찬하도록 했다. 그래서 태조실록(이성계)은 생생한기록도 있지만 개국공신으로 나라에서 록을 받으며 권좌에 있을 때 썼기 때문에 승자에게 편향된 기록도 있다.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라는 공민왕의 명을 어기고 위화도회군 할 때부터 이방원은 쿠데타의 주동자로 정몽주 등 무수한 정적을 사살했고 왕자의난을 두 번씩이나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처갓집 장인 처남까지도 죽이고 자기 아버지의 친구도 죽이는 등 아버지를 거역한 천하 불효자였다. 이성계는 불효 자식 이방원을 보지 않겠다고 함흥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태종 이방원은 임금으로 등극은 했지만 잘못을 뉘우치며 아버지를 한양으로 모셔오려 노심초사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임하던 신하를 선택해서 태상왕(이성계)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임무를 주어 함흥으로 보내 이성계를 회유했지만 이성계는 이방원이 보내는 사람마다 죽였다. 그래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왔다. 이방원이 자기 아버지 이성계에 대한 실록을 서둘러 편찬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태조(이성계)실록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록에 한번 기록된 내용은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더 그랬다. 사관들은 승자(태종)가 원하는 대로 기록 될 것을 염려해 반대했다. 실록은 사관들이 쓰고 사관들만 열람할 수 있다는 국법이 있지만 절대 권력자 태종 이방원은 실록을 보고 싶어했다. 조정대신들이 1차 2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에 반대가 있어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방원이 죽고 난 후인 4대 세종 때에 이르러 수정 편찬 했다. 김일성 3부자 실록은 얼마나 진실성이 있을까?
하지만 전통은 지켰다. 대 연산군으로 시작된 신록의 우여곡절10
제 10대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가 폐비되어 사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실록을 보고 분노하여 사상 최대의 사화를 두 번씩이나 일으켜서 몇 백명의 신하들을 파리목숨처럼 죽였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임금자리에서 떨려 났다. 19대 임금 숙종(재위 45년)실록은 9년에 걸쳐 편집되었는데 그 동안에 임금이 경종에서 영조로 바뀌고 당쟁으로 정권의 실세들이 몇 번씩 바뀌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편찬 시작 할 때는 노론의 정권이어서 노론의 사관들이 편찬을 했고 또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소론의 사관들이 편찬했다. 경종이 죽고 영조가 임금이 되자 노론사관들이 다시 편찬 작업을 끝내고 인쇄가 끝날 무렵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소론은 자기들의 입장을 살리기 위해 뺄 것과 보충 할 것이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어 보수하려 했지만 일단 만든 실록을 고칠 수 없다는 전통에 따라 그대로 뇌 두기로 했다. 하지만 잘못 된 부분을 수정 보충해 “보궐 정오”란 부책을 만들어 덧붙이는 것으로 숙종 실록을 마무리 했다.
있다? 청와대 실록은 있는가
한국 역대통령들에 대한 현대판 청와대 실록(노무현 일지만 해도 3백 76만 건)이 성남시 기록 관 (2007년 11월 개관)에 영구 보존되어 있다. 필경 북한에도 김일성 3부자의 실록이 있겠지만 모두 독재(승자) 실록일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사실로 믿고있다. 1960년 4월19일(419 학생 혁명) 학생들이 정치에 뛰어 들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학교에서 배운 대로 정치인들이 하지 않고 자기 이권을 위해 국사를 보기 때문에 학생들이 정치하는 어른들을 불신한 데서 시작 됐다. 정치가 교과서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교과서는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된 것을 학생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나라의 백년대계를 내다 보는 책이다. 나라가 걸어온 국민의 성경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실만 써야 올 바른 교육을 할 수 있다. 교과서 때문에 국론이 분분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역사교과서는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바뀌는 것은 안된다. 625 동란에 대한 사실(史實)을 남북이 막혀 문서 열람이 원활하지 않아 알기 어렵고 러시아나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했지만 이에 대한 사실도 일부분만이 공개 됐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들이 많다. 역사 재료가 충분치 않은 지금 근대사를 사실에서 먼 가정추측(假定推測)을 기초한 역사가 돼선 안된다. 현재 나와 있는 확실한 사실(史實)만을 중심으로 역사를 써야한다. 김일성 3부자에 대한 역사는 앞으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도 큰 문제다. 북한 정체는 종교화 우상화 된 부분이 많다. 세계 통계전문회사 퓨 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조직운영면에서 북 정권은 세계종교의 17번째에 해당한다고 했다.
사랑 없는 질투 없다, 질투. 왕과 나
인기 드라마 “왕과 나”에서 성종은 9대 임금으로 13세에 왕이 되어 25년 동안 보위에 있다 38세에 죽었는데 왕비 3 명과 9명의 후궁을 두어 12명의 부인을 거느리면서 16남 12여 28 남매를 두었다. 팔삭동이 한명회의 딸이 첫째 정비였는데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 성종이 임금이 되기 전 사가에 있을 때 정분이 있던 윤씨가 우여곡절 끝에 후궁으로 입궁했다. 그런데 정비 한씨가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후궁 윤씨가 왕비가 되었고 왕자 융(10대 연산군)을 생산했다. 왕비가 된 윤씨와 성종은 금실이 남달리 좋았다. 윤씨는 성종이 임금이 되자 사가에 있으면서 성종을 영영 못 볼 줄 알았는데 성종의 후궁으로 다시 궁에서 만났으니 남편 성종을 독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 옆에는 후궁들이 있었으니 속이 무척 상했다. 더구나 성깔이 영악했던 윤씨로서는 질투심도 격발했다. 질투는 사랑에서 나는 것이다. 질투는 사랑이고 사랑의 표현이다. 질투는 사랑에서 생산되는 부산 품이다. 질투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고 사랑이 행복의 극치라면 질투는 한 수 밑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이 없는데 질투가 있을 수 없다. 여우처럼 사랑하고 여우처럼 질투도 해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성종은 신진 학자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책을 많이 발간하였으며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신하들과 밤이면 미행을 자주 나가 민심을 알아보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군이었다. 성종은 후궁 귀인 정소용과 엄숙의도 총애하여 윤비는 이들 후궁에 대한 질투로 왕과 싸우다 음식상을 뒤엎어 용안과 곤룡포에 탕 국이 튀고 김치 국물이 묻는 일도 있었다. 종래에는 어린 왕자 융(후에 연산군)과도 격리되어 신경이 날카로워 졌다. 윤씨는 성종에게 격리된 왕자를 만나게 해 달라며 성종과 사랑싸움(질투)이 벌어졌고 끝내는 임금님 용안(얼굴)에 상채기를 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윤비는 폐비가 되어 사가로 내침을 받았다. 성종은 폐비 윤씨를 잊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폐비의 동정을 살피면서 다시 입궁 시키려 기회를 보았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기록에는 폐비가 된 후에도 뉘우침이 없다고 성종이 노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고 되어 있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이 임금이 된 후 생모 폐비 윤씨가 죽을 때 입고 있던 피 묻은 적삼을 외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다 연산군에게 보여 주었다. 이 때부터 연산은 폭군으로 변해 자기 어머니를 페비가 되도록 사소하고 방관한 대신, 내시, 선왕의 후궁들까지 죽였다. 이로 인해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연산은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다 죽었는데 임금 소리도 못 듣고 군(君)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야사에는 희대의 연애 사건을 일으킨 어우동을 성종도 만났다고 한다. 어우동은 바람기로 사형을 당한 최초의 여성으로 이조 실록에 등록 됐다.
박정의 장인 육종관
육영수(박정희 영부인) 친정아버지(육종관)는 4명의 소실을 두었는데 육영수는 첫째 정실의 딸이다. 네 째 소실은 일본여자 이었는데 젊고 춘천에서 왔다 하여 춘천 댁이라고 불렀다. 제정 때 조선사람이 일본 여자를 소실로 두었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이다. 당시 조선에는 자동차가 몇 대 밖에 없었을 때인데도 육종관은 자동차와 재봉틀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하니 육영수 아버지는 돈이 많은 부자였던 것 같다. 육영수의 사주는 박정희에게 시집을 보내야 팔자가 핀다고 해서 육영수어머니는 박통과 결혼 시키겠다고 우겼지만 육종관은 반대했다. 육종관은 부인과 별거 했다. 결국 육영수는 박정희와 결혼했다(참고; 김종필은 박정희와 육영수중매를 자기가 섰다고 회고록에 썼다). 육영수 여사는 아버지의 바람 끼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바람 피우는 공직자를 싫어했고 대통령의 여성편력에도 불같이 화를 내며 모진 소리로 다투기도 했는데 대통령이 던진 재떨이가 날라 다녔고 육여사의 얼굴이 부어 행사장에 나가지 못한 때도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남편이 딴 여자와 바람을 피워도 부인이 투기(질투)를 하면 칠거지악 중에 두 번째 중죄(소박 받는 죄)에 해당돼 소박까지 당했다. 그러면서 남자들은 소실도 얻고 기방에도 갔다. 질투 없는 사랑도 사랑인가! 지금 한국에는 여세(女勢)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차락우 칼럼 매주 목요일 www.seoulvoice.com 게재
한국 민속 연구원 20211111 제754호 charakwoo@hot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