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적(賊), 희대의 시인 김지하. 박정희 죽자 ‘나도 따라가겠 소’
재판 100일간 김지하 만담과 달변 재판소 인산인해.
5적시 노벨 문학상 추천.
김지하와 돈, 돈은 소통 수단, 자식 대학 못 보낸 부모의 한(限). 김지하는 박정희와 박근혜가 키웠다.
장편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사위.
술집 망한 얘기
김지하는 1941년 목포에서 태어나 뱀띠다. 본명은 김영일이고 필명은 김지하, 7년 만에 서울대학교 미학(회화)과를 졸업했다. 삶 자체를 시처럼 살아온 그는 김지하(金芝河)라는 필명으로 2022년 5월 8일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대학생 시절학생운동으로 건물 지하로 도피하면서 ‘지하’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톡홀름대학에 한국학회가 처음 창설 됐을 때 제일 먼저 번역한 책이 김지하의 5적시다. 실제로 노벨 문학상, 평화상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만약에 노벨상을 내게 준다면 국가가 5적시를 유죄라고 했는데 "나는 반체제인사로 영웅이 되겠지만 나라가 망신 된다"고 나라체면 얘기도 본인은 했다.
돈, 김지하 아들 대학 못 가
나는 옛날에 돈을 악(惡)의 증표라 봤어. 오래 살다 보니 돈이라는 게 사람과 사람사이에 "소통수단"이야. 아들에게 돈을 안주면 인상 쓴다 구. 부자지 간에도 그래. 돈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는 김지하가 기자(동아일보 1/9/2013 홍수영)에게 한 말이다. 공자(孔子)도 돈 많은 제자(자공)를 아꼈다고도 했다. 나는 매일 돈 없어 대장(자기 부인)한태 병신소리 들어. 은행가서 몰래 돈 꺼내 택시 타고 다녀서 부인대장한테 혼난다고 했다. 그는 가슴 아픈 얘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돈이 필요해. 두 아들놈 유학 시켜야 해. 아들 둘이 대학 못 갔어. 요즘 세상에 대학도 못 나오면 어디에 쓰나 내가 두 아들 대학 못 갔다 해도 놀라는 사람이 없어. 아이들도 한이 맺혔을 거야. 나는 아비로서 한이 있다고 했다. 내가 5적시를 쓸 때도 사업가들이 뇌물 주는 것 욕하지 안 했다. 하지만 국고 금 빼먹은 놈은 죽여야 한다고 했다. 내 신념이고 아니 민중의 신념이야. 장사꾼이 뇌물 주는 것은 상관없다 이거 지만 국고금이라는 건 서민들이 헐벗어 바친 세금이며 그 걸 빼먹어?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절 5적(賊 도적)시를 썼다는 죄로 김지하가 감옥에 있을 때 박정희가 죽었 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따라 가겠 소"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박정희에 대한 모든 것을 초월 했다고 일갈하고 그 후부터 박정희에 대해 욕도 구차한 말도 하지 안 했다고 한다. 동아일보에 "김 지하와 그의 시대(하문이 기자)"란 칼럼이 며칠 연재 됐다. 이 기사가 나가는 동안 인터넷 누적 조사수가 373만 건이 넘었으며 10 만이 넘으면 대박이라 함는데 370만이 넘었다 고하니 김지하는 과연 이 시대가 낳은 큰 시인이었음에는 틀림없다. 5적(賊)시는 5.16혁명 후 다섯 가지 부류의 신생 도적이 나타나 큰 부자가 된 것을 남도 판소리 풍으로 시대를 풍자한 담시(譚詩)다.
동아일보에 연재 된 그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서 그는 시대상을 잘 간파하고 통찰하는 능력이 있는 큰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됐다. 그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증언한 얘기는 마치 현대판 김 삿갓을 보는 듯했다. 5적시가 사상계 잡지에 게재 될 당시 사상계의 후원 재정 위원장이었던 김세영(탄 광업)은 5적시를 10만부 찍던 것을 배로 20만부를 찍게 했다.
5적시를 출판한 잡지 ‘사상계”는 영영 폐간
박정희 대 통령이 5적시를 읽고 "애국한다는 자가 쓴 게 뭐 이러냐."며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문제화되기 시작했다. 김승균 사상계편집 국장에게 전화가 왔는데 김기하가 정보부에 잡혀 갔는데 정보부는 그가 폐결핵환자인 것을 알고 병원에 감금하기 전에 집에 잠간 다녀오라고 했는데 이틈을 타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 이다. 그 동안 김지하는 함석헌(정치 논객)집에 숨어있다 여관으로 나와서 사상계에 전화를 했다. 김지하는 사상계 부완혁 사장 도움을 받아 서울 대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김지하는 붙들려갔고 사상계는 폐간 됐다.
김지하 재판은 100일 간 계속됐는데 법정은 항상 초만원이었다. 김지하의 익살과 달변으로 만담을 듣는 것 같았고 인권변호사 한승헌(전 감사원장)은 증언했다. 검사가 오적 시에 대해 "남한사회의 빈부격차를 부각시켜 계급의식을 고취한 용공 작품"이라고 주장했지만 김지하는 보석으로 석방 됐다.
석방 되는 날,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내차 타라 난리 법석
석방 되는 날 교도소 앞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서로 김지하를 자기 차에 태우려고 끌고 끌었지 만 김지하는 장준하(사상계 창업자)의 차를 탔다. 이로 인해 김지하는 하루 만에 대 스타 가 됐다. 김지하는 그 때를 회고 했다. 나는 그날 이후 곁길로 가지 말자! 똑바로 가자! 들 뜨지 말자를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 하지만 매스컴도 나를 톱스타로 대접했고 가는 곳마다 왕 자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택시 등 술집 밥집 내노라 상류 사람들
택시운전사 찻집주인까지 장안의 내 노라 하는 사람들이 직간접으로 만나자 했고 밥과 술을 원 없이 사주었다며 김지하는 나는 그 때 서울 바닥에 상류사회라 부르기도 뭣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스라는 말로도 과분한 어떤 장소 어떤 집단(김시인이 알지 못했던 어떤 세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 속에 나 같은 놈을 끼워 주다니 서울이 나를 허용하는 구 나! 솔직히 (나는)당시만 해도 칭찬에 굶주리고 명예에 굶주렸던 청년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이용해 김지하를 술집의 얼굴마담을 시키면 잘되겠다고 생각한 친구 (송철원 경기고 출신)가 있었다. 우리 주변에 술 마시는 사람이 무진장인데 돈은 없으니 네 가 술집 얼굴마담을 하면 공짜 술도 마시고 돈도 벌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김지하는 이를 마다 않고 승낙했다. 친구 송철원은 마침 자기 선배의 망해가는 식당을 술집으로 꾸미고 이름을 "석기시대"라는 간판을 부쳤다. 서울에 김지하 얼굴까지 실은 광고도 냈다.
김지하 모친, 하나 뿐인 외아들 버리겠다고 동업자에 역정
그 때 김지하 모친이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함부로 돌린다고 송씨에게 욕을 바가지로 했다고 한다. 술집 “석기시대”는 대박을 쳤다. 장사가 잘 되니까 술집주인인 선배가 마음을 바꾸어 운동권 학생 들에게는 돈을 안 받겠다고 해 놓고 돈을 받고 민주화 운동자금으로 돈을 준다는 약속도 안 지켰다. 결국 문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술집주인과 함께 동업으로 "레지스탕스"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1년 만에 또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공짜 술 때문 이었다. 동업자와 김지하 자신 등 친구들이 어느 때는 휴업이라고 써 부치고 이틀 사흘씩 내리 술을 마시기도 했다. 외상도 많았고 운동권 학생들이 돈 떨어지면 밀어닥쳤다. 그러자 정보원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으니 손님들이 올 리가 없었다.
김지하의 장모는 박경리 장편소설의 저자
김지하의 장모가 장편 "토지"를 쓴 박경리이고 그는 김지하를 한번 보고 사위 깜으로 찍고 딸에게 사람 똑똑하다고 결혼하라고 권고 했고 이들은 결혼을 했다. 하지만 딸 김영주는 술에 찌들어 사는 남편과 수차 이혼하려고 했지만 김지하는 이혼은 못 한다 그 대신 당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천하에 박정희와 맞선 김지하도 여자에게는 약했다. 김영주는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회관 관장으로 있다. 김지하는 한 때 운동권 동지 후배들로부터 집단으로 배신자라고 따돌림을 당했다. 1991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연재를 조선일보에 썼다.
결국 박정희가 김지하 큰사람 만들었다
김지하를 시대적인 시인으로 등장시킨 것은 박정희다. 박근혜는 대통령 입후보시절 원주로 김시인을 단독으로 찾아가 담소했다. 그를 본 김지하는 "내공이 깊었던 여자"라며 지지한다고 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됐다. <한국 민속연구원 20130919 시카고 문경 제351호 charakwoo@hotmail.com>
차락우 칼럼 매주 목 www.seoulvoice.com에 게재. 한국민속 연구원 제공 982호. 2/5/2026. www.charakw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