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박정희와 국무총리 정일권의 홀아비 타령.
박정희는 정일권의 중매쟁이.
세종대왕과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일 잘한 사람 1등 타이.
한국은 국회 때문에 국민이 불편하다.
임진왜란 해전은 세계 역대 급 해 전.
전라도 진산 사건이란 조상 신주 불사른 것. 한국천주교는 자생 천주교.
한국 역사상 나라의 물줄기를 돌려 논 중대사를 결정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10년 100년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국운이 걸린 결정을 해야 할 기로(岐路)에 있을 때가 많았다. 이 중대사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알고 싶어 진다.
한국에 손꼽히는 역사학교수, 역사소설작가, 역사연구원, 재야 역사학자 101명이 모여서 “한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들” 108가지를 선정했다. 그리고 사건들의 중요도(重要度)의 순서를 정했는데 1 위에서 20 위까지는 이견이 없었지만 21 위부터는 이견이 분분했다.
108가지 중대 사건 중 국가에 도움이 되는 국사를 제일 많이 결정한 사람은 세종과 박정희였다는 것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했고 대마도를 정벌 했고 6 진을 개척했으며 갑인자(甲寅字)주조 인쇄술을 개발했고 장가들면 처가에서 살아야 하는 전래로 내려오는 혼인제도를 바꿔서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 오도록 했고(숙신옹주친영) 공법개혁을 하는 등 6개의 중대한 결정을 했다. 박정희는 516 혁명, 고속도로를 처음으로 건설했고 경부고속 2 년 만에 개통, 월남 파병, 한일 회담, 한글 전용, 10월 유신 등 6가지로 세종과 일등 타이다.
세종과 박정희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역사적인 중대 국사를 현명하게 많이 결정했다는 것과 백성을 먼저 걱정한 것과 재위기간이 길다는 것과 好 Girl(호걸) 이었다는 풍문이 있다. 세종은 재위 31년 6개월 동안 한 일도 많았지만 기록에 있는 부인만 6명 이고 자식이 22명이나 되었다. 참고 세종(4대)의 아버지 태종(3대)은 총 20명의 부인과 12남 17녀 총29명의 자손이 있었다.
박정희는 헌법을 바꾸면서 18년 동안 장기 집권했다(참고 이승만은 12년). 국사로 바쁜 중에도 상처(1974년) 후 술자리가 자자 졌고 결국은 술자리에서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6.25동란 중 서울에서도 어느 미녀 대학생과 동거했다는 말도 있고 첫째 정실(김호남 1920-199)은 중이 됐다는 말도 있다. 재임중 영부인은 815 광복 행사장에서 저격 당해 유명을 달리 했다.
일생을 나라를 위해 충성하겠다고 맹세한 육사 출신 고급장교가 김재규 부하로 있으면서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라면서 박통 채홍사 노릇하다 김재규와 같이 사형 당한 것을 보면 박통도 세종만큼이나 호걸 이었던 것 같다.
하로는 국사를 마치고 박정희대통령과 국무총리 정일권(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3년 선배) 두 홀아비는 나이는 1977년생으로 동갑이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형님 동생 하며 술을 마시며 홀아비 타령도 했다. 하루는 박정희가 “형님 장가 드셔야 지요” 라 농담을 하자 정일권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금 모 대학의 음악 선생과 연애하고 있는데 장인 짜리가 반대해서 성사가 안 된다”고 불만스러워 했다. 박통은 자기도 홀아비 인지라 설마하고 해본 말이었는데 정일권은 그 동안 음악선생과 연애를 하고 있었으면서 박통에게 입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박통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기가 나서서 중매 해보겠다고 했다. 정일권은 장인 될 사람은 일류대학 나온 엔지니어고 잘 사는 집안이라고 했다.
박정희는 정일권의 중매쟁이
박통이 그 장인 깜에게 “따님을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출가 시켜 달라고” 일필휘지 장문의 간곡한 편지를 썼다고 한다. 박통의 간곡한 편지를 받은 장인은 감탄했는지 혼인을 허락 했고 정일권은 이렇게 해서 29세나 아래인 음악선생의 저고리 고름을 푸르고 신방을 꾸몄다. 박통은 정일권의 중신 애비가 됐다. 당시 정일권은 국무 총리였고 본처와는 사별한 홀아비였다.
정일권은 6.25 전쟁 중에 처첩을 여럿 거느린 好 Girl(호걸) 이었다는 소문이 고급장교들 사이에 퍼졌으며 부하들이 빈 도라무 통에 여성을 숨겨 일선까지 운반해 진상했다고도 한다.
이상의 임금과 대통령 다음 중대 결정을 한 사람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이 방원)과 임진왜란 때 피난 다니느라 고생한 14대 선조 임금이고 일본과 한국해역에 평화선을 선포한 이승만이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처남 등 처갓집사람까지 임금이 하는 일에 거리적 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무수한 정적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고 왕세자인 장자 양녕대군을 제치고 셋 째 아들 세종을 택해 보위를 승계 한 것 또한 잘한 일로 손꼽힌다(세종이 성군 재목임을 미리 본 것) 실록을 편찬 하도록 한 것이다.
선조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국고로 편찬하도록 명해서 중국 일본 등 온 동양에 수수 백 종이나 되는 한의서 춘추전국시대를 허준의 동의보감 한 권으로 천하 통일하게 했고 감옥에 있는 이 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임명해서 임진왜란을 우리의 승리로 이끌게 한 것. 임진왜란 당시 동원된 일본 수군 배는 133척이고 조선배는 12척으로 세계 역사상 어떤 해상 전투에 이보다 많은 배가 동원된 것은 처음이라는 것 기록. 그리고 세환 사(일본에 보낸 사절단) 파견 한 것, 여진족과의 외교 단절 한 것 등이다.
이승만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한 것과 한미동맹 체결이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한 것과 한양천도 한 것 정도전을 만나 조선을 공맹 성리학의 나라로 만든 것 등이다.
왕건의 삼국 통일, 고려 광종이 과거 제를 도 입해 오늘의 고시제도가 된 것, 광해군의 후 금에 대한 실리 외교, 대원군의 쇄국 정책과 경복궁 중건 등은 역사적인 중대한 결정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결정한 이 108가지 결정들이 현재 우리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전통 문화의 뿌리가 되어 내려오고 있다. 현재 우리들은 과거에 있었던 역사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고 그 대로하는 것이 우리의 역사로 전해 오고 있다.
한국은 국회 때문에 국민이 불편하다
국회의원들은 자기 비위에 어긋나면 이에 대항하기 위해 잠근 국회 회의실 문을 쇠망치와 전기 톱이나 도끼로 부수기도 하고 이불 깔고 누워 농성도 한다. 툭하면 머리 삭발하기도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천막에 누워 있다 병원에 실려 가기도 한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긴 하지만 한국엔 민주주의가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협상이 제3 의 평화 세계를 창조한다는 문화가 없다. 회의하다 싸움하는 것은 국회 뿐이 아니다. 국회가 난장판이다. 하지만 국회가 만든 법이 좋으나 나쁘나 나라를 다스리는 법이고 백성들은 그 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니 국민들이 불 펀한 것이다.
중국은 천주교를 통해 서양과학 문물 도입 환영
중국엔 조선보다 200년 앞서 신부가 선교했다. 이때 중국은 천주교가 생소하긴 했지만 중국이 갈망하는 서양 과학 문물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때 신부는 중국이 어떻게 반대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중국황제가 언짢아 하지 않는 방법으로 선교를 하겠다는 계획으로 중국에 들어갔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국식 단어로 상제라고 번역 했다. 이는 마치 불교가 처음 인도에 들어갈 때 토속인도 종교인 라마교와 브라만교와 타협하면서 포교를 해서 불교가 인도에서 성공하게 된 것과 같다. 중국 북경에는 북천주교 생기고 그후 남쪽에는 남 천주교가 생겼다.
이승훈의 자진 영세
우리나라 이승훈이 자기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 사(사신) 사은사로 북경에 갈 때 자진해 따라 갔다. 그리고 북천주교에 들어가 그라망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3 개월만에 영세를 받았다. 신부가조선에 들어와 포교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나타나(이승훈) 스스로 신자가 되기를 원했고 영세를 받은 것은 천주교 포교사상 유래가 없는 조선에서만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천주교와 조선의 큰 변화 는 제사(전라도 진산 조상신주 불사른 사건)
한국에서도 그런대로 자생 천주교 신자들이 생겨 났다. 하나님 앞에는 양반도 사대부도 없이 다 평등하한 사람이라고 하는 천주교 물결이 불자 차별 받던 하층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서얼 등 소외 된 사람들에게 천주교는 인기가 있었다. 그러다 진산의 천주교 신자가 제사를 거부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는 “진산사건”이 터졌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이 성한 때이어서 첫째는 천주교를 배교하는 신자들이 늘어 났고 정조임금이 천주교도를 탐탁치 않게 여기기 시작 했다. 이 때 로마교황청이 제사를 조상 숭배로 규정하고 천주교교리에 크게 위배 됨을 하달해 당시조선에 성한 때이어서 첫째는 조상 제사이기 때문에 천주교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래서 천주교가 조선에서 포교에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신자들을 희생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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